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하연 Oct 10. 2020

상처가 된 말들

말은 개별적이기도 하지만 연결되어 있기도 하다. 모처럼만에 친구 집에 모여 와인을 마시기로 했다. 먼저 도착한 나는 거실에 준비된 꽃무의 테이블 위 예쁜 음료수와 잔들을 보며 감탄했다. 그대로 풀밭에 옮긴다며 완벽한 피크닉이었다. 잠시 뒤 한 친구가 도착했다. 인사를 했다. 집으로 들어서며 작은 치즈 케이크를 건네면서 이렇게 말했다.     


“사실 내일 내 생일이야. 이 말 안 하고 헤어지면 너희가 뻘쭘할까 봐 미리 내가 말하는 거야. 그래서 내 생일 케이크는 내가 사 왔어.”    


친구의 성격답게 호쾌했다. 생일이라는 것을 이제야 알고 머쓱했는데 생일자의 산뜻한 자세로 즐겁게 그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예쁘게 차린 와인상은 순식간에 친구의 생일상이 되었다. 생일을 알게 된 이상 그냥 넘길 수는 없었다. 선물을 하고 싶었다. 뭐 필요한 거 없냐고 물었다. 자기 케이크를 자기가 사 온 아이답게 그런 것 없다고 손 사레를 쳤다. 그냥 짐작해서 사주는 선물도 좋지만 그럴 경우 마음에 안들 수도 있었다. 기껏 고민해서 고른 선물이 먼지로 재포장이 되어버린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런 마음으로 조금 강하지만 나름 위트를 담아 설득했다.    


“S야, 말해줘. 필요한 게 알려주는 게 좋아. 안 알려 주면 진부하게 스타벅스 기프티콘 이런 거 선물한다?”    

그러자 옆에 있던 J가 내게 말했다.    

“하연아 스타벅스 기프티콘 진부했니? 내가 너 생일에 그거 보냈잖아?”

“그랬니? 아 맞다. 맞네. 아아아 아니 그게 아니라……. S가 선물을 말하게 하려고 그런 건데……. 스타벅스 쿠폰 진부하지 않지. 너무 좋지. 그 진짜 커피 잘 마셨지. 대중적이어서 쓰임이 너무 좋지.”    


말들이 호랑이를 본 듯 줄행랑을 치기 시작했다. 내가 한 말이 진부했다. 주워 담을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웃고 넘겼지만 집으로 돌아와서도 내가 한 말에 친구가 상처를 받았을까 자꾸 마음이 쓰였다.    


‘그런 표현을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왜 치킨도 있고, 아이스크림 케이크도 있고 한라봉도 있었는데 때마침 스타벅스 쿠폰을 이야기한 거야? 멍청이’    


내가 나를 완벽하게 탓해야 하는 순간이었다. 내 입에서 말을 내보낼 때에는 차고지의 열차를 점검하듯 점검했어야 하는데 고장 난 말을 내보냈다. 그런 일이 있고 몇 달 뒤였다.    


첫 책이 출간되고 친구들이 축하파티를 열어주었다. 직접 차린 집 밥에 디저트까지 풀코스로 대접받고 책에도 사인을 해달라며 탑처럼 쌓아 놓았다. 처음 하는 사인. 어떤 말들을 적는 게 좋을까?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다. 얼마 전만 해도 나도 독자였다. 하루아침에 저자가 되어 읽기만 하던 책이라는 물성에 사인을 하게 되다니……. 새삼 다른 세계로 순간이동을 한 것 같았다.


책 제목이 <아이의 말 선물>이긴 하지만 사인에 들어가는 말은 좀 더 포괄적인 내용을 담고 싶었다. 그러다 생각한 것이 아이뿐 아니라 어른의 말도 누군가에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된다. 그런 의미로 친구가 이런 문구는 어떠냐며 제안했다.    


‘당신의 말이 선물이 될 수 있어요.’    


좋았다. 말이라는 것이 쉽게 뱉을 수 있기에 가시가 될 수도 있고 감미로운 선물이 될 수도 있었다. 살아가면서 제일 고맙고 소중했던 순간을 꼽으라면 누군가의 말 선물을 받을 때였다.

그 말을 한 글자 한 글자 마음을 담아 적어 내려갔다. 이름도 모르는 사람에게 가는 내 책이 그들 마음속에 작은 씨앗을 내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검은색 사인펜으로 사각사각 적어 내려가고 있었다. K가 남편이 회사 후배들에게 선물한다고 10권을 사서 사인을 받아달라고 했다.     

친구들도 고마운데 그 남편까지 그렇게 많은 책을 사준다고 하니 미안하기도 하고 과분한 사랑인 것 같아 볼이 부풀어 올랐다. 고마운 마음에 칭찬 폭죽이 터지기 시작했다.    


“어머나 네 남편 어쩌면 좋니? 내가 전부터 알아봤다니까.”

다른 친구를 바라보며

“저번에 친구 아버님 돌아가셨을 때 얘 임신 중이었잖아. 임신 중에는 상갓집 가면 안 다는 속설 있어서 망설여질 텐데도 남편이 무슨 소리냐고? 무조건 가야지. 해서 함께 왔더라. 그때 내가 다 감동이더라.”    


입에서 속사포 랩처럼 칭찬이 쏟아졌다. 나도 참 나였다. 고마운 마음을 말로 돌려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옆에 있던 친구. 그러니까 오늘 나를 집으로 초대해서 닭볶음탕을 맛있게 차려준 친구가 말했다.    


“나 그때 결혼식 앞두고 있었잖아. 그래서 거기 못 갔어. 친구 얼굴 볼 때마다 얼마나 미안한지…….”    


그 일이 벌써 오 년도 넘는 일이라 친구의 사연까지 알지 못했다. 그런데 또 본의 아니게 K의 남편을 칭찬하느라 친구의 마음에 상처를 준 것 같았다. 왜 자꾸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지? 누군가에게 한 칭찬의 말이 뒷걸음질 치며 다른 친구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이 생겼다.    


“미안해. 난 그런 일이 있는지도 몰랐어. 친구도 기억 못 할 거야. 너무 마음에 담아 두지 마.”    


라고 말했다. 동시에 내 마음에는 미안함이 쌓여갔다. 우리는 친구였기에 대부분의 상황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나는 개별적인 말을 했지만 점이 선이 되듯 연결되어 있었다.      

자꾸 누군가를 치켜세우려다 다른 사람을 다치게 했다. 내게 필요한 것은 감정을 배제한 담백한 말이었다. 칭찬하느라 전, 후 상황을 살피지 못했다.    

아이가 할머니의 출렁거리는 팔뚝 살을 만지면 물었다.    




할머니 뼈 없어요? 




뼈가 잡히지 않고 온통 살이니 뼈는 어디 갔냐고 물었다. 아이의 말은 악의가 없는 말이듯 나의 말도 그랬다. 다른 건 어른이 된 나는 내 말에 책임을 져야 했다. 그 일 이후 이제 돈을 아껴 쓰듯 말을 아껴 쓰고 있다. 말절약이 필요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