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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하연 Oct 10. 2020

마음껏 오해하자.

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 학부모 상담에 갔다. 유치원에서 학교로 환경이 바뀌어서 병아리 같은 일학년들은 적응하기 바빴다. 선생님은 아이들이 아직 시간을 잘 지키지 못한다고 하셨다. 특히 놀 시간이 여유로운 점심시간이 끝나고 수업시간에 늦는 일이 많다고 하셨다. 반복되자 하루는 아이들을 차례로 세워놓고 늦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중이었다고 했다. 그때, 더 늦게 들어온 예린이가 앞문을 쓱 열고 들어오며 해맑게 물었다고 했다.   

  

" 사진 찍는 거예요?  "


제일 늦어 놓고 아이대로 해석해서 내놓은 질문에 웃음이 터졌다고 하셨다. 심각하다가 웃음이 터져 더 이상 혼낼 수 없어 다들 들여보냈다고 했다. 선생님은 해프닝처럼 말씀하셨지만 난 얼굴이 뜨거워졌다. 마냥 웃을 수만은 없었다. 집으로 돌아온 뒤 아이에게 수업시간은 꼭 지켜야 한다고 당부했다. 아이는 단짝 친구랑 노는데 종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그럴 수 있었다. 하지만 종소리를 귀 기울여 들어야 한다고 다시 당부했다.     

벌서는 것을 사진 찍는 것이라고 오해한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했다. 오해에 대해 생각했다.


사전에서 찾아보면 ‘그릇되게 해석하거나 뜻을 잘못 앎. 또는 그런 해석이나 이해’이라고 나온다.     

같은 행동에도 바라보는 사람들의 해석에 따라 달라진다. 내 안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이다. 마음은 투명하지 않기에 서로의 마음이 보이지 않는다.    


톨스토이 우화 중 <소와 사자의 사랑이야기>가 있다. 어느 동물마을에 소와 사자가 살았다. 둘은 사랑해서 결혼해 살게 되었다. 소는 최선을 다해서 맛있는 풀을 날마다 사자에게 대접했다. 사자는 풀이 싫었지만 소를 생각해서 참고 먹었다. 사자도 최선을 다해서 맛있는 살코기를 날마다 소에게 대접했다. 사자도 괴로웠지만 소를 생각해서 참았다. 결국 둘은 한계에 부딪혀 헤어지게 된다.     


소는 자기 기준에서 생각한 좋은 것을 주었지만 사자에게 좋은 것은 아니었다. 이렇듯 내가 보는 것이 맞는 것이 아닐 수 있다. 매 순간 나에게 수렴되는 생각의 화살을 상대에게 방향을 바꿔 생각하는 노력을 끊임없이 해야 하는 것이다. 어쩌면 아래로 세차게 흐르는 강물의 방향을 바꾸는 것만큼 어려운 일일 수 있다.      


오해는 아이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아이가 유치원을 다닐 때였다. 벼룩시장 도우미로 매해 참석했다. 책, 장난감, 음식, 학용품, 옷 등 많은 영역이 있었는데 나는 책 코너를 맡았다. 저 멀리 아이가 등장했다. 6살의 작은 아이가 형님과 언니와 짝을 이뤄 손을 잡고 등장했다. 딸은 나를 찾느라 눈동자가 바쁘게 움직였다. 서로를 찾은 우리는 눈으로 달고나 같은 인사를 나누었다. 선생님께 규칙 설명을 듣고 ‘출발’이라는 구호와 함께 아이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난 당연히 아이가 제일 먼저 내가 있는 곳으로 올 줄 알았다. 아니었다. 장난감 코너로 향했다. 서운했다. 혼자 생각했다.    

“엄마보다 장난감이 더 좋구나.”    

씁쓸한 마음 거두고 있는데 아이는 장난감 코너를 지나 나에게 왔다. 아이는 책을 보지 않고 엄마가 와서 좋았는지 나만 쳐다보았다. 오랜 시간 머물 수 없으니 어떤 책이 좋으냐고 물었고 한 번 훑어보더니 책 한 권을 골라 다른 코너로 향했다.

집으로 돌아와 그날 산 물건과 마음을 풀어보았다. 아이가 산 물건에 양말, 색연필, 책, 나눔 접시가 있었다. 엄마가 나눔 접시 좋아해서 사 왔다고 했다. 작은 몸 안에 엄마를 향한 마음도 들어 있다고 생각하니 행복했다. 그리고 아까 궁금했던 걸 물어보았다.     

“예린아 아까 왜 엄마한테 제일 먼저 안 왔어?”

“난 가고 싶었는데 손잡은 언니(형님반)가 장난감 있는 데로 갔어.”

“아. 그랬어?”    


그것도 모르고 오해했다. 혼자 장 보러 다니던 게 아니라 짝을 이루었다 것을 잊은 채 내 아이만 보고 혼자 오해했다. 마음이 엉킬 때로 엉켰는데 이야기를 듣고 실타래처럼 술술 풀렸다.


아이뿐만 아니라 인간관계에서도 우리는 많은 오해를 하고 오해로 인한 갈등에 힘들어한다. 아이에게는 묻는 것은 쉽다. 왜 그런 건지 마음을 알아보려는 노력을 자주 기울인다. 그렇게 이야기하다 보면 아이의 속마음을 알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어른들끼리의 대화는 아이와의 대화와는 조금 달랐다. 일단 어떤 말로 물어야 할지 고민이고, 묻는 과정 속에서 또 다른 오해를 불러올까 봐 걱정하기도 한다. 그래서 그 과정 없이 지레짐작을 하고 생각을 키웠다. 오해의 풍선을 키우다 결국 감정이 ‘팡’하고 터졌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마음의 빗장을 걸어 잠그는 것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나의 빗장을 열기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그대로 묻어두고 가는 일이 많았다. 소통에는 큰 힘이 들기 때문이다.     

오해하지 않는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오해를 풀어가는 삶은 존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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