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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하연 Sep 06. 2023

디저트 편지

결혼기념일 편지

<편지> 


목에 걸려 있는 말

빼내고     


종아리에서 

맴도는 말 꺼낸다     


췌장 뒤에 꼭꼭 숨어 있는 말도

찾았다


있는지도 몰랐던

몸속의 말들을 꺼내    


종이에 올려놓으면     


보이지 않던 마음이 

엑스레이처럼 또렷해진다




< 2023.3.23시로 쓰는 일기 >




결혼기념일이었다. 남편에게 어떤 선물을 하면 좋을까 고민했다. 좋아하는 피노누아 와인이 좋을까? 골프용품이 좋을까? 생각했지만, 두 개 모두 평소에도 살 수 있는 것들이라 내키지 않았다. 뭔가 특별한 것을 선물하고 싶었다. 순간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맛있는 편지를 쓰자.

편의점에 들러 과자들의 이름들을 훑어보았다. 말이 되는 단어는 무엇일까? 두유, 왕뚜껑, 쌍쌍바, 투게더 아이스크림을 샀다. (처음처럼도 살걸) 집으로 돌아야 커다란 전지를 펼쳐 놓고 진한 매직으로 한 글자씩 적기 시작했다. 내가 사 온 간식들의 단어가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편지를 썼다. 그리고 단어 위에 물건들을 올려놓았다.

/

to. you (두유)

그대와 내가 결혼해, 한 쌍(쌍쌍바)이 되었네요. 살다 보면 가끔 (왕뚜껑)이 열릴 때도 있지만 서로의 웃음 버튼이 되어 (투게더) 살아요. p.s-결혼기념일에 삼겹살을 피해 주세요. 분위기 있는 곳 좋아해요.

/

아이스크림은 녹을 수 있으니 냉동실에 넣어 두었다. 인터폰에 ‘차량이 도착했습니다.’라는 알람이 뜨면 그때, 편지 위에 간식들을 올려놓아 완성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 남편은 거실의 입체 편지를 보며 이게 뭐냐며? 미소 지었다. 거실로 들여와 자세히 들여다 보고는, 손뼉을 치며 요즘 유행하는 더글로리의 명대사, 


“멋지다. 하연이”라고 외쳤다. 


올해의 결혼기념일은 그에게 선명하게 기억되었을까? 그는 고가의 선물을 바랐으려나? 



고가의 선물 대신 고가의 마음을 보낸다. 



이렇게 맛있는 편지를 받은 사람을 아마 처음일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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