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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하연 Jan 08. 2024

2. 졸업식에 들고 갈 꽃다발을 살까? 말까?

삶의 크고 작은 문제해결

꽃다발 없는 졸업식은 바람 빠진 튜브라고 생각했다.

상상할 수 없는 일. 평소라면 6년에 한 번 있는 아이의 졸업식에 당연히 꽃다발을 가져갔겠지만, 그날은 고민이 되었다.


다음 날, 호찌민으로 여행을 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일주일 내내 집을 비워야 하니, 꽃다발을 감상할 시간이 없었다. 사실 뭐 부유하다면 다음 날, 꽃다발을 감상하지 못해도 일회용품처럼 사도 되지만, 오래 보고 느끼고 싶었기에 망설여졌다.


'요즘 유행하는 풍선 꽃다발을 살까? 아니야. 그것도 바람이 빠질 텐데...'

사소한 고민은 점점 커져갔다. 꽃다발은 미리 준비해야 하는데,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며칠을 보냈다. 그러다가 졸업식이 코 앞으로 다가왔다. 고민에 마침표를 찍어야 했다. 평소 자주 찾는 꽃집에 문의를 했다. (2일 전 촉박한 주문이었다.)


"딸 졸업식 꽃다발을 주문하려고 하는데요. 혹시 꽃 말고, 오래가는 소재 위주로 꽃다발을 만들 수 있을까요? 왜냐하면 다음 날, 여행을 떠나서 일주일 동안 꽃을 못 볼 것 같아요."

"가능해요. 소재 위주로 만들어 드릴게요."

"공주님은 어떤 색을 좋아하나요?"

요즘 청소년기라 블랙과 그레이만 입는 아이여서 쉽게 답을 하지 못했다.

"색은 잘 모르겠고, 청소년 시기여서 시크한 스타일로 부탁드려요."

"시크하게 준비할게요."


꽃다발이 시크하다니? 내가 말해놓고 어떤 꽃다발이 완성될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다만 좋아하는 꽃집이었고, 그동안 만들어 놓을 꽃들이 감각적이었기에 대표님에게 기대어 걱정을 떨쳐냈다. 꽃다발이 뭐라고, 난 이렇게까지 오래 고민하고, 쉽게 결정하지 못하는지... 나도 참, 나다.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일상의 이벤트인 하루를 허투루 보내고 싶지 않았다.


드디어 졸업식 아침.

졸업식은 10시 30분이었다. 10시쯤 꽃집에 들렀다. 동네 꽃집이었기에 핑크, 민트, 파랑, 화이트 등 화사한 꽃다발이 가득했다. 다 예뻤다. 어떤 게 내 꽃일까? 두리번거렸다. 대표님이 나를 보더니 저 뒤에서 꽃다발을 꺼냈다. 마치 무대 뒤에서 배우가 나오듯 두근거렸다.


따단!

꽃다발의 얼굴이 보이는 순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딥그린의 커다란 포장지 안으로, 연두색, 초록색, 민트색, 갈색, 진초록 등 초록 폭포가 쏟아지는 듯했다. 촘촘한 정원같기도 했다. 어디서도 본 적 없는 꽃다발이었다.

졸업식의 상징인 발랄하고, 사탕 같은 컬러가 아니라 중후하고, 고급스러웠다. 보자마자 시크하다.라고 생각했다.


시크

라는 단어 하나로 만들어진 작품이었다. 대부분은 오래가는 소재였고, 한쪽 귀퉁이에 조명을 켠 듯 환한 흰 튤립과 폭죽 같은 꽃이 화사함을 더했다.


"너무 예뻐요. 이런 작품이 나오다니... 역시... 센스가 넘쳐요”

"아? 그래요? 이번 시즌에 비슷한 주문이 많아 겹칠 수도 있었는데, 역시나 너무 유니크한 주문 덕분에 이번에도 재밌는 꽃, 소재 많이 만져봤어요."


좀 귀찮은 주문이 될 수도 있었는데, 재밌게 생각해 주어서 오히려 내가 감사했다. 제약된 상황이 재밌는 꽃을 만들었다. 만약 졸업식 다음 날, 여행을 가지 않았다면 꽃이 가득한 다발을 주문했을 것이다. 하지만 예기치 못한 상황으로 꽃이 배제된 꽃다발을 주문하게 되었다. 고민이 무색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시크한 꽃다발 덕분에 졸업식의 에피소드가 더해졌다. 몇십 년이 흘러도 기억에 남을 만한 날이 되었다. 좀처럼 좋은 평가를 하지 않는 아이도, 자기 스타일이라며 마음에 들어 했다.


삶에서 주어지는 다양한 문제들은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는 씨앗이다. 어떻게,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모른다.


이 일을 계기로 나의 고민이 누군가를 만나면 해결을 넘어, 멋진 작품이 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고민을 혼자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실력자에게 기대 보자. 뜻밖의 결과가 펼쳐질 것이다.



<플레르콤마에서 만든 졸업식 꽃다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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