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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하연 Sep 27. 2024

여름의 색을 모으는 < 파랑일기 >

컨셉기록 1 : 컬러일기

아이의 여름방학이 시작되었다. 아이와 선생님은 기다린 시간, 엄마들은 미루고 싶은 시간이었다. 다른 것보다 긴 시간 동안 아이의 삼시 세 끼의 식사를 챙겨야 하는 것이 부담이었다. 의무만 가득한 시간이고, 급식으로 한 끼를 해결하는 평소의 삶에 감사하게 되는 시간이기도 하다. 몇 번의 방학을 지나면서 시간이 증발하는 기분이 들었다. 한 달, 두 달 시간이 지나 개학을 하면 "방학동안 난 뭘 했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허무함의 회색 기분을 다른 색으로 바꿔야 했다.


오래 책방 대표님과 부모들을 위한 <방학일기>를 기획하면서 어떤 일기를 쓰면 좋을까?라는 고민을 했다. 그러다 계절의 찬란함에서 힌트를 얻어 파랑일기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부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세상은 그대로인데 곳곳에 있는 파랑색만 보이기 시작했다.  엽서도 파랑, 티백도 파랑, 명함도 파랑이었다. 오래책방에서 나눠 파랑노트에 전에 사 둔 톰과 제리 엽서를 붙였다. 배경이 파랑색으로 찰떡이었다.  



내지에는 캔디바를 닮은 아이스크림과 달력을 붙이고, 이런 글을 썼다.

'창작자는 용기를 잃으면 끝장.'  <출발선 뒤의 초조함 / 이슬아>

방학 동안 일기를 완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야심차게 담았다.



스타벅스 리저브드에 가서 원두 카드가 파랑색이면 그날의 이미 행복했다. 종이 한 장으로도 행복할 수 있다니 공짜의 행복이었다. 먹던 티가 하늘색이라는 이유만으로 맛이 궁금해졌다. 어느 날을 아파트 분리수거장에서 쓰레기를 뒤적거렸다.

소득 없는 날들이 지난 어느 날, 종이 분리수거통에서 투섬플레이스의 스누피 컵 홀더를 발견했다. 너무 기뻐서 소리를 지를 뻔 한 걸 겨우 참았다. 이게 이렇게 기쁠일인가? 나조차도 놀라웠다. 그 종이를 날름 들어서 가져가려는데, 아이가 "엄마 그거 더럽잖아. 벌레가 있을 수도 있고, 뭐가 묻었을 수도 있잖아?"라고 걱정을 했다. 그 말도 맞지만 '하늘색이잖아. 커피를 마시지 않아도 이 홀더를 가질 수 있잖아.'라는 생각이 앞섰다. 일단 들고 들어와서 비닐봉지에 담아 일기에 붙였다. 뿌듯했다. 이 일은 파랑일기를 쓰는 동안, 가장 오래 기억될 에피소드였다. 국제도서전에서 받은 돌고래 북마크가 있어야 할 곳도 일기 속이었다. 존재의 이유를 모른 채, 곳곳에 흩어져 있던 파랑색에 의미가 하나씩 생겨나고, 자기 집을 찾기 시작했다.


방학일기를 쓰는 한 달 동안, 가족여행으로 마쓰야마를 가게 되었다. 평소라면 여행 후, 호텔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보며 휴식을 취했을 것이지만 나는 파랑일기를 써야 했다. 여행지에서도 파랑 찾기를 계속했다. 문구점에서 산 줄무늬 마스킹 테이프와 모닝글로리 엽서도 하늘색이었다. 엽서를 일기장에 붙이고 그날 있었던 일들을 적었다.





7월 22일 (월) / 도고온천 + 마쓰야마

저녁이 다 되어 덴푸라를 먹으러 갔다. 튀김음식이라고는 명절에 먹는 게 전부인데, 여기서는 바로 앞에서 재료 하나하나를 바로 튀겨 주었다. 갓 튀긴 재료는 식은 튀김과는 다른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 혀의 모든 감각을 자극하는 극강의 행복이었다. 하지만 행복도 반복되면 물리는 법. 가지 - 호박 - 양파 - 치킨 - 돼지고기의 순서가 되자 느끼해지기 시작했다. 그때 아이가

"도저히 느끼해서 더는 못 멋겠어."라고 백기를 들었다. 그러자 남편은 "자기의 느끼함은 자기가 해결하는 거야."라고 말했다. 나도 느끼하던 차여서 남편은 어떻게 스스로 느끼함을 해결하는지 관찰했다. 우리는 튀김만 먹었는데, 남편은 종류별로 소금에 찍어 먹고, 밥에 명란을 비벼서 먹고, 매실장아찌, 단무지 등 다양하게 즐기고 있었다. 말 그대로 느끼함을 스스로 해결했다.


삶에서 문제들을 직면할 때면, 오늘의 말을 떠올려야지.

자신의 느끼함은 자신이 해결하는 거야.





그런 의미에서 방학이 무료하고 지친다면 불평하지 말고 해결해야 한다. 파랑일기가 그 대안이 되어주었다. 가을에는 브라운 일기가 되어도 좋고, 겨울의 눈일기가 되어도 좋다. 컬러 일기를 쓰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선글라스를 쓴 듯 다른 세상의 색을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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