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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하연 Sep 19. 2022

시치미 수집

수집 디자이너






초등학교 때, 우표, 크리스마스 실, 딱지를 수집하는 친구들이 있었다. 그들을 옆에서 바라보기만 했을 뿐 수집의 세계에 발을 디뎌 본 적은 없었다. 그런 내가 수집을 시작하게 된 건 서른이 넘어서였다. 에버랜드에서 놀이기구를 타고 나오는 길 선물 가게에 들렀다. 수천 개의 물건 중 내 눈에 띈 것은 작은 아이스크림 장난감이었다. 갈색의 와플 콘 위에 분홍색 딸기 아이스크림 한 덩이가 올려져 있고, 바삭한 막대 과자가 빨대처럼 꽂혀 있었다. 한 입 베어 물고 싶은 모양이었다. 이건 뭘까? 궁금했다.

(에버랜드에서 만난 아이스크림 볼펜)



아이스크림에 꽂힌 막대 과자를 누르자 콘 아래로 펜이‘뿅’하고 튀어나왔다.




볼펜이었다. 눌러보기 전까지는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볼펜이면서 볼펜이 아닌 척하는 모습이 귀여웠다. 관심 밖이었던 볼펜이 그때부터 내 마음속으로 걸어 들어왔다. 볼펜이라는 물성보다는 자신이 볼펜이면서 아닌 척하는 ‘시치미’가 좋았다.


그날부터 시치미(자기가 하고도 아니 한 체, 알고도 모르는 체하는 태도) 수집이 시작되었다. 겉모습에서 이미 볼펜인 것을 알아챌 수 있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볼펜인지 몰랐는데 알고 보니 볼펜인 것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관심을 두기 시작하니 곳곳에 시치미 떼는 볼펜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마트에 가서도, 문구점에 가서도, 여행 가서도 볼펜을 찾으려고 두리번거렸다.      


고흐 전시에서 산 볼펜





일본 여행에 갔을 때, 고흐 전시를 본 후 아트숍에 들렀다. 작은 물감이 눈에 띄었다. 아무리 눌러도 물감은 나오지 않았다. 수상쩍었다. 뚜껑을 돌돌돌 열어보니 볼펜이 나왔다. 물감의 시치미는 처음이었다. 고흐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전시보다 물감 볼펜을 만난 게 더 좋았다. 남들은 신경도 안 쓰는, 나만 느끼는 즐거움의 세계가 따로 존재했다. 수집의 순간들이 모여 하나, 하나 스토리가 쌓여갔다.






그동안 수집한 볼펜



   

그렇게 사 모은 볼펜을 소개해보자면, 기차 볼펜은 기차의 앞칸을 분리하면 그 속에 볼펜이 나온다. 창문의 불이 들어오기도 하고, 바퀴가 달려 실제로 굴러가는 자동차는 뒤쪽의 트렁크 부분을 누르면 앞쪽에서 뾰족한 심이 튀어나온다.



빗 볼펜은 손잡이 끝을 열면 볼펜이 나온다. 실제로 머리카락을 빗을 수 있다. 빨강 립스틱도 알고 보면 볼펜이다.

피자 조각, 수박 한 조각, 초콜릿 네 조각도 볼펜이고, 젓가락, 성냥, 열쇠도 아닌 척하지만 볼펜이었다. 가지고 있는 볼펜 중 가장 위트 있는 물건은 뚫어뻥 볼펜이다. 뚫어뻥처럼 아래는 흡착이 되는 초록색 고무 재질이고, 손잡이 부분을 떼어 내면 볼펜이 된다. 책상에 세워 놓고 쓸 수 있어 편리하고 왠지 냄새가 날 것 같은 상상도 하게 된다. 안경 볼펜은 실제로도 착용할 수 있고, 양쪽 안경 대에 두 개의 볼펜이 숨어있다. 하나의 몸체에 두 개의 볼펜이 달려 있어 이색적이다.

뼈 볼펜은 해부학 책에서만 볼법하지만, 윤기 나는 하얀색을 띠고 있어, 볼 때마다 조형적이고 아름답다. 지푸라기 빗자루 볼펜은 노트에 글을 쓰다가 책상에 있는 지우개 가루를 쓸어버리는 기능까지 있어서 아끼는 볼펜 중 하나였다. (그 볼펜은 좋아하는 박준 시인이 동네 도서관에 강연을 왔을 때, 선물해서 지금 내겐 없다.)      



볼펜을 수집하는 내게, 친구들은 볼펜을 선물해 주기도 했다. 꽃이 만개한 볼펜, 진짜 나무에 무당벌레가 매달려 있는 볼펜, 대만에서 사 왔다는 노란 꽃무늬가 그려진 물고기 볼펜은 선물 받은 것들이다. 볼펜 수집이 내 인생의 유행이던 때, 그 어떤 것보다 볼펜은 최고의 선물이었다.




좋아하는 뼈 볼펜과 젓가락, 뚫어뻥 볼펜


    

문득 다른 사람들에게 볼펜은 어떤 의미일까? 궁금해졌다. 누군가는 공부하고 다 쓴 볼펜을 모았다. 공부하는 동안의 시간을 수집했다. 몇백 개의 볼펜이 쌓여갔다. 노력은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지만 공부하는 동안 다 쓴 볼펜으로, 시간을 만질 수 있었다. 내가 볼펜을 통해 시치미를 수집하듯, 누군가는 볼펜을 통해 노력을 수집했다.


수집은 많이 하는 직업으로는 승무원을 들 수 있다. 승무원은 직업 특성상 여행이 잦기에 누군가는 나라별 마그네틱을 수집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스타벅스 컵을 수집했다. 한 승무원은 비행기 안에서 볼펜을 사용하는 일이 많았고, 다른 항공사는 어떤 볼펜을 사용하는지 궁금해서 수집을 시작하기도 했다. 다른 항공사의 볼펜을 수집하면서 사람들에게 말을 건넸다. 볼펜 수집이 아니라면 소통할 기회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볼펜을 그냥 쓰는 용도로만 본다면 별것 아닐 수 있지만, 그것이 소통의 도구가 되고, 노력의 흔적이 되면 특별한 물건이 되었다.



식당에서 나온 볼펜






무엇이든 어떤 태도로 대하는지에 따라 다른 의미가 된다.



같은 볼펜이어도

누가 수집하느냐에 따라 다른 분위기를 남겼다.


수집은 닫힌 마음을 열어주었다. 한 가지만 고집하던 내게 다채로운 세상을 알게 해 주었다. 볼펜 수집으로 조금씩 열린 문 안으로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왔고, 좁은 마음의 방을 환기시켜 주었다. 수집은 관심만 가지면 누구나 가지면 가질 수 있는 손 안의 행복이다.



다른 장소, 다른 시간에 만난 볼펜 한 자루는 운명이기도 했고, 인연이기도 했다. 볼펜은 삶 속에서 책갈피 같은 역할을 했다. 그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어디에서 시치미를 만났는지 알게 해 준다.



볼펜은 그림자처럼 그동안의 삶의 시간을 함께 걸어왔다.




시치미를 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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