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도 아무 말이 없어. 반가웠다. 와서 고맙다. 이런 말을 하면 얼마나 좋아. 표정도 없으니 좋은 건지, 싫은 건지 알 수가 없어서 가끔은 맥이 빠져.”
아버님이 요양원에 가시고 어머님은 매주 아버님을 찾았다. 아버님이 좋아하는 음식들을 만들어 갔고, 남편과 시동생은 아버님과 이발소에 들러 머리를 손질 했다. 어떤 날은가까운 곳으로 나들이를 가기도 했다. 아버님이 요양원 생활이 어떤지, 우리를 만나면 어떤 기분인지 궁금했지만, 표정이 없으셔서 알 수 없었다. 물어도 “그냥 그렇지 뭐.” 하시는 게 다였다. 그러던 어느 날, 카톡으로 요양원비가 전송되었다. 매달 찍혀 있는 금액만 확인하고 말았는데, 옆에 <급여 제공 항목>이 있다는 걸 알고 눌러보니, 요양원에서 제공하는 다양한 지원 항목이 적혀 있었다.
<신체 활동 지원>
- 세면, 구강청결, 머리 감기, 몸단장, 옷 갈아입히기 도움
- 목욕
- 식사 종류(섭취량) : 일반식, 죽식(정량)
- 화장실 이용하기 (기저귀 교환) : 대변, 소변, 설사
-산책, 외출
-특이사항
-작성자 명
<인지 관리 및 의사소통>
특이사항 : (예) 음식을 잘 못 삼키십니다. (ooo)
유치원에서 받아본 아이의 생활 기록보다 요양원의 기록이 더 자세했다. <급여 제공 항목>을 보며 아버님이 하루에 기저귀를 몇 번 갈았는지, 대, 소변을 몇 번 보았는지, 건강상 어떤 어려움이 있었는지, 어떤 신체 활동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한 달 후에 알 수 있는 기록) 나는 앉아서 찬찬히 각각의 요양보호사들이 적어 놓은 특이사항을 살펴보았다. 지난달의 아버님의 하루하루였다.
- 변 못 보셔서 촉진 후 좌약 삽입해 드림(변 보심), 불편한 곳 없으시냐고 물어보니 괜찮다고 말씀하시면서 텔레비전 시청하심
- 환하게 인사해 주심
- 점심 생활관에서 편안하게 다른 어르신들과 함께 잘 어울려 드시고 tv 시청 및 생활 습관 등 자기 의견 소신 및 확신 있음
- 노래자랑 시간 “선생님들도 노래 부르는 거 듣고 싶어.라고 하심”
- 외부 식사 후 뭐 드셨냐고 여쭤보니 고기 먹었어. 하심. 맛있었냐고 하니 웃으심
- 건강검진, 생활관에나 오시는 걸 안 좋아하시고 침상에만 있으시길 원하심
- 방에서 나오지 않고 늘 방에서만 계시려 함
- 옆 어르신 침대에서 떨어질까 받쳐주심
- 변 보시고 기저귀 빼놓으심. 빼놓은 걸 기억 못 하심.
- 아직 다리에 힘이 없으신데 화장실 가서 소변보시려고 하심. 뒷 처리도 안되심.
- 식사 간식 등 드시는 것 잘 드심. 실버 체조 참여. 열심히 따라 하심
- 00 배님 소리에 짜증내심
- 보호자 면회 다녀오심. 기분이 좋으심
- 밤에 잠을 못 주무신다고 하셔서 보호자님께 말씀드려 본다고 하자 하지 말라고 하심, 이유는 돈 들어가서 안 된다고 함.
- 스스로 화장실 다니고 계심, 화장실 이용 시 문을 잠그시고, 도움드리려고 해도 거부하심, 워커 사용 안 하시고 걸으심.
- 아침 인사 드리니 손 흔들며 반겨주심
- 케어해 드리면 고맙다고 하심
- 보호자 면회 하시고 기분이 좋으심
- 혈압이 낮으셔서 하지거상 해드리고 관찰 중
기록을 통해 아버님이 집에 계실 때처럼 그곳에서도 가만히 있으시려고 한다는 걸 알았고, 어머님과 우리가 왔다 가면 기분이 좋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집에서는 고집이라고 말했던 부분이 요양원에서는 의사 표현이 확실하다는 말로 해석되기도 했다. 기록을 적어 놓은 담당자가 시간대별로 바뀌었는데, 000이라는 분에게는 늘 고맙다고 인사하는 모습도 알 수 있었다. (다른 분에게도 감사의 말을 전했는데, 기록하지 않았다면 알 수 없는 부분) 어떤 글에는 직원의 말을 듣지 않아서 약간의 짜증이 느껴지기도 했다. 무미건조해 보이는 기록도 감정이 묻어났다.
일상에서 막연히 아버님은 잘 지내고 계신 건지? 궁금할 때가 있었는데, 기록을 통해 그동안 내가 알고 있는 아버님보다 더 많은 걸 알게 되었다. 기록은 반짝이는 순간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여행을 잊기 않기 위해, 아이의 성장기 말을 잊지 않기 위한 기록은 많이 보았지만, 요양원의 말들은 처음 접했다. 기록은 전 생애에 거쳐 유의미했다. 요양원에서 온 기록은 사람을 연결했다. 요양원 직원들의 일지를 통해, 아버님의 상황을 어머님, 남편, 서방님, 며느리까지 알게 해 준다. 보이지 않는 시간의 궁금증을 해결했다. 가족이라면 그렇게 자세히 들여다보며 기록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본 말들을 어머님께 전했다.
“아버님이 어머님 가신다고 좋아하는 기색이 하나도 없다고 하셨잖아요? 요양원 기록 보니까, 만난 후에는 늘 기분이 좋으시대요.”
“그랬대? 다행이다. 나한테는 영 표현을 안 해서 몰랐어.”
“노래 교실에서 선생님도 노래 부르라고 하셨대요. 유머는 여전하시더라고요.”
“그 양반은... 거기서도 그러네.”
어머님은 그 말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으면 넘기셨지만, 난 그 메모에 큰 별표를 그렸다. 딸을 낳고 2년 넘도록 날마다 전화하는 아버님이 힘겨웠다. 아버님은 손녀의 옹알이가 듣고 싶으셨을 뿐이었지만, 내겐 하루도 쉬지 않고 걸려오는 전화에 자유가 박탈된 기분이었다. 그 부분은 갈등을 빚을 만큼 힘든 부분이었지만, 나는 아버님의 유머는 좋아했다. 가족들은 허튼소리 한다고, 실없는 소리 한다며 면박을 주었다. 하지만 난 빛나는 생각이 담긴 아버님의 유머에 혼자 웃었고, 엄지를 추켜올리기도 했다. 그 유머의 말들은 적어 놓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젠 구체적인 아버님의 유머가 떠오르지 않는다.
요양원의 기록에서 아버님 모습 그대로를 느낄 수 있었다. 집에서 어머님이 기초적인 것들을 아무리 하라고 해도 잘하지 않으셨다. 친구들을 만나러 밖을 잘 나가지 않으셨고, 잘 움직이지 않으셔서 건강이 걱정되었다. 요양원에서도 침상에 누워있으려고 하는 모습이 비슷했다. 가족들은 퇴직 후, 집에 혼자 있을 때, 아버님의 고립된 생활을 하는 게 마음이 쓰였다. 비록 가족은 아니지만 요양원에서는 많은 사람이 함께여서 아버님이 외롭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아버님이 화장실에서 볼 일을 볼 때, 스스로 해결하려고 애쓰는 모습은 자존을 지키려고 애쓰는 모습 같았다. (직원들에게는 말 잘 안 듣는 모습이라 힘드실 테지만) 핸드폰 화면에 써진 요양원 기록을 보며 아버님의 한 달을 그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