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벨에 반해 와인을 좋아하게 되었다. 비빔밥, 팥빙수처럼 형태와 색이 있는 음식은 보면서 맛을 추측이라도 하는데, 짙은 갈색병에 담긴 와인은 맛과 향을 짐작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와인의 바다로 들어설 때, 예쁜 라벨은 등대 같았다. 책 표지를 보며 소설을 짐작하듯, 라벨을 보며 와인을 생각했다.
코로나시기, 사람과 단절되어 혼자만 즐길 수 있는 취미가 필요했을 때, 와인에 관심이 생겼다.남편과 둘이 와인샵에 들러 미술관의 작품보듯 라벨을 감상했다. 갤러리의 그림을 사듯 와인 한 병씩 샀다. 집에 와서 맛있는 음식과 페어링 해서 미식생활을 즐겼다. 모르는 와인을 하나씩 맛보는 게 그 시절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와인을 생산하는 나라와 품종이 방대해서 즐겁기도 했지만, 약간의 스트레스도 존재했다. 한 번의 선택이 한 병을 즐겁게 마시느냐 참아가며 마시느냐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잘 익은 수박을 고르면 먹는 내내 행복하지만, 맛없는 수박은 애물단지가 되는 것과 같았다. 처음 다양한 와인을 먹다가 피노누아를 알게 되었다. 레드와인보다 옅은 농도로, 은은해서 좋았다. 맛과 향이 강하지 않으니(아닌 것도 있지만) 어떤 음식과도 잘 어울렸다. 우리는 어차피 세계의 모든 와인을 다 파악하기 어려우니, 피노누아로 정해서 다양한 와인을 탐험하기로 했다. (소설만 읽어서 편독하듯 피노누아만 편음하기로 했다.) 그러자 맛의 실패가 적었다. 선택과 집중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와인의 가격도 천차만별. 코로나 때는 와인만이 유일한 취미였다면 지금은 와인 말고도 즐길 것들이 많았다. 그래서 그때만큼 가계의 많은 비중을 와인소비에 할애할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일본에 사는 친구의 이야기를 들었다.
"일본은 세븐일레븐에 파는 와인이 훌륭해요. 생각해 봐요. 세계의 많은 와인 중, 회사의 와인 전문가가 골라놓은 거잖아요. 일단 한 번 선별된 것이기 때문에 질이나 맛이나 어느 정도는 보장된 거죠."
설득력 있는 이야기였다. 편의점 와인에 관심을 기울인 건 그때부터였다. 친구네 집들이에 갈 때도 편의점 와인 두, 세병씩 사가고 함께 마시다가 좋아하는 맛을 기록했다. 와인에 관심을 기울이다 보니 계절처럼 와인을 접하는 방식도 다채로워졌다. 다양한 와인을 맛보기 위해 소노벨 호텔에서 개최한 와이너리 프로그램에 참여가며, 맛비티아이도 찾았다. 그러다 도심 속에 와이너리인 <탭샵바>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몇 십종의 와인이 작은 냉장고 안에 들어가 있어서, 원하는 와인을 맛볼 수도 있고, 한 잔을 사서 마실 수 있었다. 탭샵바의 앱에 들어가서 금액을 충전하고 기계에 큐알코트를 탭 하면 와인이 약수 나오듯 졸졸졸 나왔다. 평소 먹고 싶었지만 가격대가 있어서 먹지 못한 와인들도 한 잔이면 용기를 내서 먹어볼 수 있었다. 한 병을 사서 실패할 일이 없어 좋았다. 와인뿐 아니라, 사케, 위스키 등 술의 종류도 다양해서 그날의 기분에 따라 술을 고를 수 있었다.
한 때, 나는 와인병을 찍어 와인일기를 썼고, 남편은 엑셀 파일에 나라, 품종, 도수, 와인 감상을 적었다. 와인의 오묘한 맛을 나의 언어로 표현하는 건 어려웠지만, 그 과정이 난해해서 이색적이었다. 닭장 냄새가 나는 와인은 아직도 강렬하게 남아 있다. 와인 기록은 오래 지속하지 못했다. 어느 정도의 노력이 필요했고, 바쁜 일이 생기자 뒤로 미뤄졌다. 그래도 늘 와인을 마시며, 이렇게 숄숄숄 마시기만 하는 게 아쉬웠다. 기록하지 않으면 와인을 골랐던 이유와 기분, 장소, 맛이 증발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탭샵바에서는 내가 마신 와인을 대신 기록해 주었다. 앱에 내가 어떤 와인을 마셨는지 순서대로 기록되었고, 와인 사진뿐 아니라, 나라, 품종, 도수, 가격까지 보여주었다.
마시기만 했을 뿐인데, 탭샵바가 서기처럼 알아서 와인일기를 써 주었다.
소비자 관점의 접근법이었다.그날 남편과 나는 각자의 원탑 와인을 이야기하며 시간을 보냈다. 주기별로 와인도 교체된다고 하니, 정기적으로 방문하고 싶어졌다. (광고 아님, 감동임) 좋아하는 것이 생기면 향유를 넘어 그 순간을 기록하고 싶어 진다. 하지만 기록은 노력이 동반되어 에너지가 많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 에너지를 줄여주다니, 누워서 떡먹기 기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