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데생 1 -6
그게 대순가. 더 이상 그를 생각한다는 것은 무의미했다. 편지만도 그랬다. 계속 주고받을수록 서로에 대한 그리움이나 애잔할 뿐이지, 갑자기 어떠한 상황이 바뀌어서 그가 내 앞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었다. 잠시 미국 생활을 접어두고 여권을 가지고 한국에 잠시 들어갈 기약은 편지에 코딱지만치도 들어가 있지 않았다.
군대 가는 시기를 전후로 하여 범준과의 추억을 끊을 참이었다. 모질다. 한편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그에게 편지로 전한 글들도 소리같이 강도조절이 확연하게 느껴질 수만 있다면 크게 외치듯 말하고 싶었다. 언제든 함께 광화문 네거리나 덕수궁 내를 같이 다닐 수 있었으면 좋겠어. 그럴 수 없었기에 외로웠다. 그래서 그를 생각하지 않으려 편지도 쓰지 않았다. 그 편이 훨씬 속 편했다. 집에 그의 편지는 수취인불명으로 봉투도 뜯지도 않은 채 수북이 쌓여갔다.
어느 정도 지워져 희미해진 줄 알았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와 헤어진 지 오 년 만에 그가 한때 짝사랑했던 경화가 내 앞에 나타나서 속을 뒤집어 놓았다. 흔적을 일깨우고 각인시켰다.
“저기 저 자리 있죠?”
“네.”
“예전에 저하고 범준하고 둘이 덕수궁에 왔었는데요. 그때가 마침 영화 촬영 중이었나 봐요. 여러 사람이 많이 몰려서 장사진을 이루었죠. '기쁜 우리 젊은 날?' 아니야 '우리 기쁜 젊은 날?' 암튼 배창호 감독하고 배우 안성기가 눈에 들어왔어요.”
“어머. 저도 그 영화 봤는데 기억이 나요. 황신혜가 나중에 죽잖아요. 무척 슬퍼서 저는 그때 무척 울었던 것이 생각이 나요. 친구랑 같이 가서 펑펑 울었던 기억이 나요.”
“아, 그래요. 저도 봤어요. 무척 슬픈 영화라는 생각은 했지만 울지는 않았는데. 알고 보니까 덕수궁에서 촬영한 장면이 제일 마지막 장면이었더군요. 황신혜가 아이를 남겨 두고 죽었을 때 안성기가 그 아이를 데리고 벤치에 앉아서 삶은 달걀을 까 주는 장면이더라고요. 애드리브라고 그러죠. 별 대사 없이 그냥 달걀은 이렇게 먹는 거야. 어쩌고 저쩌고.”
경화는 내가 하는 이야기에 무척 빠져 있었다. 입을 가리고 소리 내서 웃거나 손뼉 치며 좋아했다. 말하는 것도 어제보다는 훨씬 인간미가 넘쳤다. 그것이 훨씬 좋았다.
“그래서요? 그래서, 그다음에는요?”
“배창호 감독이 오케이 사인을 하자 모두 수고했다. 박수를 보내더군요. 저는 영화 촬영하는 것을 가까이서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라 같이 박수를 보내며 좋아했지요. 그런데 갑자기 범준이 그림 그리려고 가져갔던 스케치북과 연필을 들고 당당하게 안성기하고 배창호 감독한테 가서 사인을 받아오는 거예요. 그것도 두 장씩, 넉 장을. 하하…, 스케치북을 들이밀자 크기에 맞게 크게 사인을 두 장씩 해주더군요. 범준이 그런 극성에는 탄성을 지를 정도였습니다. 여자 팬들이 많이 몰려서 도저히 헤집고 들어갈 수가 없을 거 같았는데, 여자들이 어우, 어우…, 소리를 지르는데도 막무가내였어요.”
경화는 내가 유쾌하게 말하는 것을 계속 봐주면서 같이 따라서 즐거워 좋아하는 모습이었다.
덕수궁을 나와 K 문고로 향하는 시청 앞에 강렬한 햇빛이 반사되어 눈이 부셨다. 오 년 전. 아니 범준이랑 같이 왔을 때는 육 년 전이었다. 그때 햇빛과 별달라진 바가 없었건만. 경화와 같이 있는 순간에는 적적해하지는 말아야지. 그런데도 힘들었다. 그가 내 곁에 없는데 그리워한다는 자체가 가슴 억누르는 답답함임을 그녀는 아는지. 모르는지.
그때 시절에 특히 k 문고를 들어가는 입구 쪽의 지하통로 -그는 내게 자신만이 알고 있는 세계를 알려 주는 양, 무척 들떠 있었고 나는 그 안에 예속되는 것이 절대적 기쁨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음을 서서히 느끼고 있었다! 그가 그리웠다. 이제는 만날 수도 연락도 할 수가 없다. 그도 나와 한국을 그리워하는 때가 있을까.
내가 k 문고에서는 주로 베스트셀러를 모아놓은 문학 쪽으로 눈을 돌리고 있으면 경화는 전문 서적 판매대에 있다가 곁에 왔다. 거기서도 카뮈의 이방인을 찾아서 읽었는데 뫼르소가 아랍인을 총으로 쏴 죽이고 감옥에 갇혀 있을 때 헝가리에서 일어난 사건을 담은 신문쪼가리를 읽는 대목이었다.
“카뮈를 무척 좋아하는가 보군요. 도서관에서 만났을 때도 그 책을 읽고 있었던 거 같았는데.”
“예. 전에 읽었는데 다시 읽으니까 새롭군요.”
“어머. 그래요? 언중 씨는 독서광이신가 보군요.”
“그렇지는 않아요. 왜 영화도 가끔 보고 나서 나중에 한 번 더 보고 싶은 그런 거 있잖아요. 그런 거 하고 비슷해요.”
“아…, 그래요.”
경화는 두 손을 모았다. 동작은 이야기를 정말 잘 들어주고 있다, 부각하는 것 같았다.
무의미하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었다. 중간에 K 문고를 나와 종각을 지나고 종로 3가를 거쳐 피카디리극장이나 단성사에 이르렀을 때도 줄곧 난 억지로 좋은 표정을 보여 주고 있었다. 너무나 힘들었는데도 계속 반대의 모습을 보여 주려 애썼다. 인생은 반대편에 서서 다른 모습을 남들에게 보여 주려고 사는 날들의 연속이던가.
“여기가 답니다.”
경화한테 말해주었다. 마치 어느 곳을 찾으러 왔다, 그곳이 다른 영업장소로 바뀌어져 예전 모습을 바라볼 수 없던 거와 같이 거의 탈진한 사람처럼 매가리가 없이 굴었다. 하긴 범준과 같이 오지 않았으니 그 당시와는 모든 것이 달랐다.
“뭐가요?”
“범준이랑 왔던 곳이요.”
더 이상 할 일이 없어진 사람처럼 심심한 상태였다.
“혹시 말이어요?”
“네?”
“언중 씨는 애인 없었나요? 저는 범준 씨 이야기도 이야기지만 그런 이야기도 궁금해요. 하고 싶지 않다면 어쩔 수 없지만 말이어요.”
이상한 일이었다. 갑자기 그런 이야기가 불쑥 나올 상황은 아닌데. 아무래도 범준 이야기가 띄엄띄엄 느릿느릿 이어진 것이 이야기의 흥미를 잃게 만든 거 같았다. 그렇다 치더라도 범준보다 한참 전 에피소드를 쉽게 꺼낼 수도 없을 거 같았다. 한 사람도 아니고 두 사람이 연결돼 말은 길어져 시간을 보내기에는 더없이 좋겠지만, 내키지 않았다. 퍼뜩퍼뜩 스쳐 갔다. 경화가 내게 침을 놓듯 아프게 쿡쿡 찌르는 것도 같았다.
“글쎄요, 별로 할 이야기가 없는데요. 그저 그랬어요.”
“그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