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데생 1 -5
언중. 형이 조용히 나를 불렀다. 형은 자동차부품 납품하는 중소기업에 다니는 중이었다. 대학 졸업 후의 유통회사에 들어갔다 성에 안 찼나, 금방 그만두었다가 중소기업에 들어간 지도 얼마 안 된 것 같았다. 형은 나한테 미안해했다. 여태껏 가족 중에 형 역할에 대해 변명조로 늘어놓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형이 하는 말만 들었다. 이제 조금 있으면 형편이 나아질 터니 어머니가 하시는 말씀 귀담아듣고 상처받지 마라. 어머니가 좀 신경이 예민해지셨어. 형도 어머니한테 시달리고 있었는지 어머니 말을 잠깐 들먹이고 당부도 곁들였다. 힘들 거야. 제대하자마자 일 찾기가. 돈을 벌려고 들지 말고 시간을 벌어라. 시간은 주어지지 않는다. 네가 만드는 거다. 조급해할수록 푼돈에 허덕이게 돼. 시간을 두고 생각해.
그렇게 오랫동안 침묵으로 보내던 형이 나한테는 아예 관심이 없는 줄 알았다. 때로는 어머니 때문만이 아니라도 가족이라는 굴레가 참기 힘들 정도로 부담이었고 나를 속박하는 것으로 여겼다. 그리고 언제나 나를 중심으로만 생각해 보았지, 늘 애착을 두고 바라왔던 배려도 없었다. 그나마 형제는 언제나 따로이고, 커갈수록 서로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 적어진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고 있는 터였다. 나이 차가 많이 나서 그럴까. 형의 나이는 삼십 대를 훌쩍 넘어섰다.
한동안 듣지 않았던 '별이 빛나는 밤에'를 틀어 보았다. 그 시그널 뮤직에 스스럼없이 추억에 젖어들었고 이문세의 여유 넉넉한 목소리가 세월을 멈추게 했다. 언제나 그대로였다.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었다. 전화하고 나오라고 하면 당장이라도 범준이 달려올 것만 같았다. 모든 세월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렸고 그대로 어두운 방에 라디오만을 켠 채로 누워 있었다. 예전 시절로 돌아가고 싶었다. 고등학생 때 미술반원을 같이 했던 시절로.
-별밤지기. 마구간지기 문세 아저씨. 안녕하세요. 이번에도 정성이 가득한 엽서들을 모아 별밤 엽서 전을 열었네요. 예쁜 엽서 전을 갔다가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어요. 너무 잘 그렸더군요. 저에겐 시간의 여유도 없고 그림 실력이 없어 많이 망설였습니다. 그래도 이번에는 꼭 참여하고 싶어 용기를 냈습니다. 못 그렸다고 타박하시지 않을 거죠?
경화가 다니는 화실을 알고 있었다. 성남 성호시장 부근에 있는 새로 지은 팔 층짜리 큰 건물이었다. 그곳은 여러 군데 고등학교가 밀접해 있는 곳이었고 나도 범준이 학원 수업이 없는 날에 초대받아 따라갔다. 학원은 개방된 상태라 학원에 등록한 사람이면 혼자서 모자라는 데생 실력을 따라잡기 위해 보충적으로 그림을 그리러 올 수 있었다. 거기에 나도 덩달아 끼워져서 범준을 쫓아간 거였다.
범준이 미술실에 오면 경화를 하도 떠들어 호기심이 극도로 달한 상태였다. 드디어 경화를 보는구나. 그렇지만 그날 경화는 보이지 않았다. 그저 전에 학교로 그녀의 그림을 가져온 거처럼 그림이나 몇 장 구경했을 뿐이었다.
범준이 미국으로 떠나고 그렇게 그가 우상같이 말하던 경화를 보러 간 것은 토요일의 중간 오후였다. 학교 수업을 파한 뒤였다. 토요일도 이즈막 이 데생 수업이 있다는 거는 익히 알고 있었다. 수업이 한창 진행 중에 찾아가면 대단히 실례였으므로 그전에 잠깐 만나야겠다고 생각 중이었다. 건물에 들어서고 화실의 낯선 풍경들은 새로웠다. 범준이 나를 불렀을 때는 학생이 거의 없었고 이젤 앞에서 그림 그리는 학생도 없었다. 화실에 들어서기 전 복도에서부터 여러 학생이 북적대며 돌아다니는 모습들은 이채로 왔다. 마치 그들은 나를 새로 학원에 등록하러 온 학생같이 곁눈질을 주며 스쳐 갔다. 누군가 한 사람을 불러서 경화를 불러 달라고 해야 하는데 용기가 나질 않았다. 한창 머뭇거리다 화실 문을 들어서려는 머리가 긴 여학생에게 말했다. 박 경화를 불러 주세요.
-아, 경화 언니요? 경화 언니 만나러 오셨어요? 언니! 언니를 찾는 분이 오셨는데요? 남자분이세요.
남자라고 하니까 화실 안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들려왔다.
-남자? 남자래. 우와….
드디어 경화가 모습을 드러냈다. 짧은 단발머리에 얼굴이 무척 하얗고 맑았다. 그게 내 첫 느낌이었다. 범준이 애가 타게 좋아할 만한 외모였다. 경화는 무척 궁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커피자판기가 있는 낡은 소파 부근으로 나를 데려가더니 금방 자판기 커피를 뽑아서 권했다. 그리고 금방 누구냐고 물을 거 같은 얼굴로 입을 떼려는 거 같았다. 그러기 전에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범준이랑 같은 학교에 다녔던 김 언중입니다. 같이 그림을 그렸었죠.
-아. 네.
-범준이 이민 간 거 아시죠?
-네.
나는 경화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고 이야기할 수가 없었다. 내참에는 여러 이야기가 술술 나올 거 같았는데, 실지로 그녀 얼굴을 보니 목소리를 가다듬을 수 없이 떨렸다. 그 눈부신 하얀 얼굴이 반사되어 바라볼 수가 없었다. 복도 창에 시선을 두고 약간의 말미를 두다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편지는 혹시 받으셨나요?
-네.
-범준이가 답장을 안 쓴다고 야속해하는 거 같았어요. 그래서…, 제가 부탁 좀 드리려고 온 겁니다.
이내 범준이 내게 보내온 그림을 보여 주었다. 이문세의 '별이 빛나는 밤에'라는 글자가 총총히 새겨진 엽서 두 장을 합쳐 만든 그림이었다. 화려한 밤 도시의 풍경이 멋진 그림이었다. 거기에는 내 이름과 그리워하는 경화의 이름도 있었다.
-답장하나 만 써 주세요.
범준이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해 달라는 의도에서 경화한테 그 엽서를 안겨 주었다.
-범준이 MBC에서 개최하는 엽서 전에 보내 달라고 제게 보내 준 겁니다. 그렇지만 엽서 전에 보내든 안 보내든 상관은 없습니다. 범준이 마음만 이해해서 주면 됩니다.
경화한테 인사도 없이 복도를 빠져나와 계단으로 향했다. 나가면서 뒤를 돌아보았을 때, 경화가 부른 거 같기도 하고 그냥 황당해서 멍하니 있는 거 같기도 한 모습이 눈앞에서 아른거리며 스쳐 지나갔다.
건물을 빠져나오자마자 허탈해졌다. 이게 뭐한 짓인가. 부질없이. 그는 떠나고 없는데. 경화한테는 내가 찾아간 것만으로도 부담을 준 거 같았다. 영 개운치가 않았다.
얼마 후 범준이 무척 기뻐하는 내용의 편지가 집으로 날아들었다. 그렇게 전혀 미동도 없던 경화가 자신한테 답장을 주었고, 내가 경화한테 전해준 엽서는 '별이 빛나는 밤에'에 벌써 경화가 부쳤다는 내용을 자신에게 보내왔더란다. 또 얼마쯤 후엔가 무슨 학용품 같은 기념품 셋이 별밤 책자와 함께 MBC로부터 왔다. 별밤 책자에는 범준이 그린 엽서가 가득 장식됐다. 모두 무의미했다. 그가 곁에 없는 상태에서 그러한 일들이 달갑지 않았다. 이런 내 마음을 경화가 알 것인지, 범준이 알까. 아니면 이문세가 알아줄까.
그 사람 모습은 전혀 없는데 흔적들이 계속 주위에서 맴돌며 부질없는 감상만 부추겼다. 냉철히 말하자면 범준, 그가 어떻게 살든 경화가 어떻게 지내든, 이문세가 어떤 노래를 부르든 간에 내 알 바는 아니었다. 어찌어찌 살다가 수년이 흘러서 길 가다가 우연히 만났을 때 서로를 알아보면 그나마 다행이다. 나는 어쩌자고 하루에도 몇 번씩 그 많은 범준의 편지를 읽고 또 읽고, 도대체 무슨 짓을 하는 것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때론 이런 나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 이놈의 브로맨스는 언제 끝낼 거지. 신물 나.
내가 경화를 못 알아보았던 것은 언뜻언뜻 스쳐 갔던 것이 전부였고 학교 다닐 때와는 달리 직장생활을 해서 그런지 화장으로 덮여있었기 때문이었다. 여자는 그 나이 때에 이르러 변화를 예견하고 하던데. 머리모양을 바꾸던가. 화장법을 새로 터득한다던가. 경화의 변화를 내가 읽지 못한 탓도 있었고 그쯤에 나는 여자에 대해 관심조차 없었었다. 경화를 대했던 느낌이 아무래도 극히 짧았다. 못 알아봤던 것은 당연한 거였다.
전화기는 거실에 있었고 경화의 명함을 보고 수화기를 들었다, 놨다.
‘Y 인테리어 실장 박 경화’
“뭐 하니? 안 자? 밤늦은 시간에 어디다 전화하려고 그래? 빨리 자.”
어머니 눈치가 보여서 할 수 없이 밖에 공중전화부스로 달려갔다. 그리고 경화의 삐삐에다 음성을 남겼다. 내일 만나자고. 범준이랑 보냈던 그 시각들로 달려가고 싶다고.
경화는 다음날 화사하게 미소를 지으면서 버스 타는 곳에서 맞이하고 있었다. 나도 웃으면서 그녀에게 점점 가깝게 다가섰다.
범준은 미국으로 이민 가고 없었다. 콜롬비아 주 어디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