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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규만 Aug 13. 2023

벙거지를 쓴 남자크로키 1 -4

 1 데생 1 -4

갑자기 빗줄기가 창가로 타다 닥 소리를 내면서 부딪쳤다. 방금 경화와 함께 레스토랑에 들어왔을 적에는 그리 우중충한 날씨도 아니었고 비가 올 조짐을 보이는 구름도 보이질 않았건만 비가 세차게 들이쳤다. 강한 빗줄기였다. 경화를 앞에 두고 대화를 이어 나갈 생각은 하지 않았다. 빗줄기로 흐려진 희멀건 풍경을 바라봤다. 소나기였다. 한동안 창틈으로 비 때리는 소리가 들렸다. 후드득. 멍해지고 말았다. 나는 또 감상에 젖은 건가. 

 “뭐 하죠? 범준 씨 이야기를 좀 더 해 봐요. 더 듣고 싶어요.” 

 “아…. 잠깐 비가 와서, 어디까지 이야기를?” 

 “정동 라디오 극장까지 간 것까지 말했잖아요.” 

 “아…. 예. 그렇군요. 그때는 난처하기도 했었고 불안했었죠. 남자는 우리뿐이었으니까요. 직접 연예인이 출연한 것도 봤어요. 너무나 즐거운 한때였어요. 그 이후로 ‘이문세의 별이 빛나는 밤에’를 무지 좋아하게 된 겁니다. 지금도 이문세의 -별이 빛나는 밤에 -시그널 음악이 잔잔히 흐르면 범준이랑 지냈던 일들이 생각이 나요. 엽서도 그가 그려서 보낸 것이 저한테로 다시 미국에서 온 것이지요. 내용에 경화 씨 이야기가 너무 간절하게 쓰여 있어서 찾아간다는 약속을 했고 급기야는 정말 찾아서 그한테 편지를 써 달라고 부탁을 드렸던 겁니다.” 

 “바로 어제 일같이 생생하게 기억하는군요. 그런데 언중 씨  말이 맞아떨어졌군요. 덕수궁 돌담길을 같이 걸으면 헤어진다는 것이 사실이 되었군요. 연인이든 친구이든. 지금은 연락을 안 하나 봐요. 편지는 끊겼나요?”      

 “저는 군대 가야 했거든요. 국제 편지는 군대에서 보낼 수 없잖아요. 뭐 그렇다고 아예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죠. 얼굴을 볼 수 없는 상태에서 편지로만 세월을 헤아린다는 거는 너무 힘들었고 우선은 그것보다는 입대 전에 학력고사는 엉망이 되어버렸죠.” 

 “왜요?” 

 “노력하지 않았으니까요.”

후, 한숨을 터트렸다. 그만 이야기해요. 무의미해요. 빗줄기는 시원스레 내리쳤지만 비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맥주를 들이켰다. 경화는 계속 이야기를 기다렸다. 하던 이야기 계속해요. 하다 말고 뭐예요. 비가 싫었다. 비가 내리면 모든 것이 멈추어지고 대기상태로 돌아가야만 한다. 군대에서도 그랬고 지금에 와서는 그나마 막일도 나가지 못한다. 그런 대기상태를 표현하는 거처럼 이야기를 끊은 것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요? 어떻게 됐는데요? 네?” 

무척 궁금한 얼굴을 한 경화의 맑은 눈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서서히 기억의 한편에서 떠올랐다. 범준 편지를 들고 화실로 갔을 때 어떤 연유로 자신을 찾아왔는지 무척 의아해하던 그 하얀 얼굴과 그 맑은 눈 속에 내 얼굴이 들어 있었던 때를. 

“시험은 봤지만, 붙을 자신이 없었어요. 뭐 대학이 인생에 전부인가 생각은 해도 저는 저 자신과의 싸움에서 계속 지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네요. 곧잘 어느 인생에서 대학에 들어갈 시점으로 가정형편을 들먹이기도 하죠. 정말로 실력도 실력이지만 저는 정말로 노력하지 않았어요.” 

 “아직 늦지 않았어요.” 

 “화실도 다녔어요. 열심히 그렸다고 생각했어요. 실력이 늘지 않더군요. 중간에 그만두었어요. 저는 끈기가 없나 봐요. 자꾸 환경만 운운하고. 같이 친하게 지냈던 복용도 그랬어요. 경화 씨랑 같은 말을 했었죠. 아직 늦지 않았다.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그러면 지금은 그림은 안 그리고 공부만 하려고요?” 

 “이렇다 저렇다 확실히 결정된 사항은 아무것도 없어요. 지금도 계속해 보려고 생각 중이긴 한데……, 모르겠네요.” 

 “음. 그렇군요. 그러면 내일 덕수궁에 가보지 않을래요? 오랜만에 저도 그곳을 둘러보고 싶은데. 머리도 식힐 겸 어때요?” 

 뜻밖에 제안이었다. 나는 망설였다. 예전 생각이 나서 힘들어지지는 않을까. 기억의 책장을 한꺼번에 흐트러뜨려 괴로운 심사를 맞이하지 않을까. 

 “안 갈 건가요? 내일 일이라도 생긴 건가요?”      

계속 맥주만 들이켰다. 역시 맥주는 배만 부르군요. 경화의 말에는 들은 척도 않은 채 엉뚱한 말만 했다. 비가 언제 그칠까. 우산도 안 가지고 나왔는데. 경화는 고개만 수그렸다. 

 “저 그렇게 마음이 여의치가 않아요. 일부러 저를 만나려고 연차까지 냈는데 미안하군요. 제가 마음의 여유가 생기고 자리가 잡히는 대로 연락드릴게요. 고개 좀 들어봐요.” 

경화는 고개를 들었다. 이내 자신의 명함을 내놓았다. 

 “연락해 주세요. 자리가 안 잡혀도 마음이 우울하거나 술을 마시고 싶으면 언제라도 연락하면 나올게요.” 

생각보다 어딘가 트인 면이 보이는 여자였다. 겪어보지는 않았지만 좋은 여자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막힌 면이 있다면 오히려 나 자신일 거였다. 도대체 마음의 여유라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되지도 않는 말을 경화한테 한 것은 아닌가. 

 경화는 다음번을 기약하며 웃는 얼굴로 날 바라봤다. 연락할 거죠. 많이 아쉬워하는 눈으로 끝까지 놓치지 않으려는지 내가 먼저 일어나도 전혀 미동이 없었다. 

 술자리를 나와 그녀와 헤어지고 나서도 한참을 걸으며 생각했다. 대화하는 그 시간 동안 그나마 행복하고 좋은 시간이었다면 더할 나위 없이 바랄 것이 없겠건만, 경화에게 쫓기기만 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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