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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규만 Aug 09. 2023

벙거지를 쓴 남자크로키 1 -3

1 데생 1 -3

“술 마실 시간은 있지요.” 

 “아이…, 정말.” 

경화는 가볍게 눈을 흘기며 미소 지었다. 심각하던 얼굴이 밝게 퍼지는 여자의 미소였다. 술은 그녀도 고대했던 사항인지 외려 반기는 눈치였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깔끔하고 짧은 여자 미소였다. 나는 금방 경화의 미소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술집들은 대낮에 왜 술을 팔지 않을까요? 알 수가 없어요. 술집을 찾아 여기저기 쑤시듯이 같이 돌아다니다 경화가 좀 지쳤는지 내뱉듯 던진 말이었다. 대부분 이른 시각이라 그 흔하디 흔한 호프집도 문을 연 곳이 없었다. 도서관 뒤쪽으로 이어지는 대로로 2번 버스 종점을 거쳐도 간판만 번질거리고 문은 닫혔다. 

 그나마 성남시청 쪽으로 넘어가는 중간 한 집이 문을 열어서 들어갔다. 오후 네 시에 문 여는 곳인데요. 지금 청소하려고 문 연 건데. 차라리 커피나 한잔하고 말 걸 그랬나. 그랬으면 도서관에서 간단하게 마셔도 될 일이었다. 경화를 데리고 성남 시내를 한 바퀴 순회하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발길을 돌리다 시청 쪽에서 겨우 찾아냈다. 그것도 경양식 집에 가면 맥주를 파는 곳이 있으리라는 경화의 짐작 섞인 말을 듣고 간 곳이었다. 자리를 잡은 곳이 높은 7층 건물에 스카이라운지 분위기를 낸 레스토랑이었다. 뜨뜻미지근한 병맥주와 돈가스 안주가 나왔을 때 경화가 내게 물었다.

 “아침마다 버스 탈 때 정말 저인지 몰랐어요?” 

 “네.” 

 “버스 탈 때는 옷차림이 이렇지 않았는데.” 

 “아. 그때는 분당으로 일을 나갔었죠. 막 일을 했어요.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일을 했었습니다.” 

 “그랬군요.” 

 “경화 씨는 어떻게 지내세요? 물론 지금은 직장생활 열심히 하시겠지만.”

나는 말끝을 늘어뜨렸다. 그 시절이 생각나서였다. 풋풋한 고등학생이었다. 경화도 그랬고, 나도 그랬고. 

 “전에 학교 다닐 때 범준이가 경화 씨 그림을 화실에서 몰래 훔쳐 와서 저희끼리 품평회도 했는데요.” 

 “어머? 그랬어요? 창피하게.”

경화는 너무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며 몸 둘 바를 몰라했다. 그녀의 데생은 새로운 세계였다. 미술부 반원끼리 그린 그림과는 차원이 달랐다. 당시에는 신선함을 불러일으키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그림만큼 그녀도 꽤 궁금했었다. 대체 얼마나 많이 그리기에 이렇게 잘 그린단 말이야. 학교도 안 가고 밥만 먹고 그림만 그리는 거 아냐. 그렇게 궁금했던 그녀가 바로 앞에 나타나 나를 찾다니. 참 희한하고 기막힌 일이었다.

 경화를 눈빛을 찬찬히 응시하며 말을 이어 나갔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는데요.” 

 “뭐요?” 

 “왜 저를 찾아온 거죠?” 

 “너무 오랜만이라 반갑기도 하고 어떻게 지내는가, 궁금했어요.” 

 “그 말은 조금 전에도 했잖아요.” 

 “그럼 어떤 걸 물어보시는 거죠?” 

 “연차휴가까지 내셨다고 하셔서요. 무슨 다른 중요한 일이 있는가 싶어서요.” 

 “아니에요. 저를 몰라보셔서 내심 섭섭했어요. 어떻게 못 알아볼까. 똑똑히 기억나는데. 이때 나서지 않으면 다음에 이런 기회가 오지 않을 것 같았어요. 너무 오랜만이라서.”

그래. 어떻게 못 알아볼 수가 있어. 이처럼 아름다운 여자를. 말도 안 되지. 경화의 말이 내게 그렇게 묻는 것 같았다. 경화는 잠시 머뭇머뭇 내 눈치를 살피는 거 같기도 하고 다른 할 말이 있는데 못하는 거같이 보이기도 했다. 그러다 말했다. 

 “이제 제대하신 지 얼마 안 됐죠?”

 “네. 한 달쯤? 그 정도 된 거 같아요.”

 “며칠 전에 버스가 안 와서 발을 동동거리고 있는데 언중 씨가 지나가는 것이 반가웠어요. 그런데 이번에는 버스를 타려고 기다리지 않고 그냥 가는 거예요. 이상하다 싶었죠. 옷차림도 바뀌고 가방도 하나 메고 있더군요. 계속 가는 뒷모습만 바라봤는데, 가는 방향이 도서관 쪽이더군요. 그래서 금방 알아차렸던 거예요. 공부를 시작했구나. 그날 회사 가서 연차 신청했지요.”

 “그랬군요. 기분이 좋은걸요. 경화 씨가 제 뒷모습을 바라보아 주었다는 거요.” 

 “뭐, 좋다고 하시니까 제가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경화가 고개를 숙이고 부끄러워하고 있으니까 나도 어색해졌다. 화제를 돌려야 분위기가 자연스러워질 것 같아 범준이 이야기를 화두로 올렸다. 

 “고2 때가 생각이 제일 간절해요. 처음으로 방송국이란 곳을 범준일 좇아갔었습니다. 이문세 아시죠? 지금도 그가 별이 빛나는 밤에 디제이를 하고 있죠. 범준이가 별이 빛나는 밤에 공개 방청권 -두 장을 내밀어 보이면서 같이 가자고요. 별이 빛나는 밤에는 공개 방청을 매주 목요일에 했는데 우리가 학교에 가지 않는 날이라 가게 되었죠. 어떻게 안 가게 되었는지는 뚜렷하게 기억에는 없고요. 아마도 개교기념일이었을 겁니다. 아니면 소풍을 갔다 오고 나서 인가? 여하튼 공개녹음방송은 오후 세 시쯤인가, 시작하나 봐요. 빨리 와 줄을 서지 않으면 다음에 오라, 철문을 닫아 버리니 미리 가서 대기하자고 그랬어요. 한정된 자리 배석이라, 뒤에 많은 이들이 그대로 돌아간다더군요.” 

 “범준 씨는 언중 씨 말고 다른 사람과도 여러 번 그곳에 가 봤나 보군요.” 

 “아니요. 혼자서 가 봤대요. 여자애들 틈바구니에 끼어서.”

 “그랬군요. 그래서요? 그다음에는요?” 

경화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마치 여상사가 부하 남자 직원을 대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요. -주로 부하직원들한테 여상사가 여유를 가지고 요모조모로 줄자로 갖다 대는 형식을 취한 말투다. 조금은 누그러뜨리지 않고 바짝 경계심을 취한 느낌도 받았다. 그것이 기분 나쁜 거는 아닌데 딱딱하고 사무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신경이 곤두섰다. 적기를 타지 못해 자연스럽게 흘러가지 않고 부딪쳤다. 말이 끊길 우려가 다분했다. 그렇지만 애를 썼다. 말을 기다리게 할 순 없어 그녀에게 받는 시선조차 회피하고 말았다. 그러면 그럴수록 말은 속도감의 리듬을 타고 조율하는 중이었다. 

 “중요한 것은 시간이 맞지 않았다는 것이죠. 마냥 죽치고 서너 시간씩 기다린다는 것도 그렇고 여자애들이 줄이 형성되어 있을 때까지 다른 걸로 시간을 보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겁니다. 기다림의 미학이라고 그래야 하나요? 바로 그런 걸 겁니다. 좋아하는 공연 한 시간짜리를 하나 보기 위해서 열 시간을 넘게 기다린다. 우리는 광화문네거리에 이순신 장군 동상 옆 K 문고와 정동 라디오 극장을 몇 번씩 오가고는 했습니다. 책을 보다가 덕수궁 돌담길을 거쳐 정동 라디오 극장에 이르면 여자애들이 줄이 형성되었는가를 확인하고 없으면 K 문고로 가고. 제가 그랬었죠. 덕수궁 돌담길을 같이 걸으면 헤어진다고 하던데 우리가 헤어지게 되는 것 아닐까. 그랬더니 범준이 그러더군요. -이런 바보. 연인들이 걸으면 헤어지는 거야. 우리가 연인이냐? 친구야! 친구! 걱정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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