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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규만 Aug 05. 2023

벙거지를 쓴 남자 크로키 1 -2

1 데생 1- 2

도서관에 가기 위해 서두르다 보니 아침밥을 걸렀다. 꼭두새벽부터 허기가 졌다. 커피믹스를 아침부터 들이부었다. 속만 쓰렸다. 

 자판기가 있는 복도에 나와 카뮈의 이방인을 읽었다. 오른손은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들고 나머지 한 손은 책을 들고 있는 엉거주춤한 상태였다. 

 “저기요.”

뒤에서 누가 부르는 소리가 났는데 여자 목소리였다. 뒤통수가 따가웠다.

 “저기요! 잠깐만요.” 

고개를 돌려 여자를 바라보았다. 단정하게 빗은 단발머리였다. 유난히 빨간 립스틱에다 화장이 짙었다. 파란색 체크 스카프를 두르고 아래위로 같은 카키색의 남방과 바지 차림으로 말쑥하게 차려입은 여자였다. 아침에 저 정도 차림이면 무척 부지런한 여자인 것 같았다. 

 “누구?” 

 시선을 맞추고 보니 분당으로 아침에 일을 나갈 때 버스를 타려고 기다릴 때 마주치던 얼굴이었다. 여자 쪽에서 반기는 기색이었다. 그제야 나는 그녀의 얼굴을 기억하고 그녀가 왜 여기에 있고 나에게 아는 체를 하는지 금방 궁금해졌다. 그때 아는 척을 못 한 아쉬움을 이렇게라도 풀려고 왔나.

 “저 모르시겠어요?” 

 “아…, 아침마다 버스 탈 때 자주 봤던 것 같네요.” 

 “예. 그때도 봤었지만 다가갈 수가 없었어요. 아침에 버스 타느라 경황이 없어서. 저 경화예요. 경화. 박 경화. 모르시겠어요? 고등학교 삼 학년 때 제가 다니던 화실에 범준 씨 편지를 가지고 찾아오셨었죠? 언중 씨 맞죠? 어제부터 도서관을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겨우 찾았네요.” 

 “아….” 

내가 탄성을 지르듯 놀란 것은 그녀가 미국에서 온 범준의 편지를 내보였기 때문이었다. 분명히 편지 봉투에 그의 머리글자인 정이라는 첫 자가 선명하게 파란색 볼펜으로 쓴 것이 보였다. 

“벌써 오 년 전에 일이군요.” 

그녀가 말했다. 맞다. 오 년의 세월이 흘렀다. 오 년. -뉘앙스에서 시간의 무게가 제법 느껴졌다. 그녀와 내가 처음 맞닥뜨렸었던 것은 너무나 짧은 시간이었다. 내심 고민하다 화실로 찾아가서 그녀에게 인사하고 범준의 애절한 내용의 편지만을 전하고 별말 없이 짧게 헤어졌었다. 그 이후로도 그녀에 대해 별로 생각한 바가 없어서 얼굴을 봐도 못 알아보는 것이 당연했다. 그녀가 이름과 범준의 편지를 보여 주지 않았더라면 정말로 경화인지도 알아차릴 길이 없었다. 그래서 구종점에서 내게 아는 척을 하려고 그렇게 애를 썼던 거구나. 그제야 감이 왔다. 

 “저는 단번에 언중 씨의 짙은 검은 눈썹을 알아봤지만, 그냥 시간을 보냈어요. 많이 망설였어요. 아는 체할까 말까. 저는 먼저 오실 줄 알았는데. 기다렸거든요. 그러다 아침에 봤던 언중 씨가 안 보이더군요. 후회가 밀려오는 거예요. 먼저 아는 체를 할걸. 그런데 바로 이틀 전인가 가방 메고 가는 모습을 본 거죠. 쫓아가려다 출근할 시간이 맞물려 경황이 없었어요. 방향을 대충 보니 도서관 쪽이더군요. 그래서 언중 씨 만나려고 어제부터 아예 연차를 냈어요.” 

 “그랬군요.” 

그냥 무덤덤하게 대했다. 우연치고는 묘한 우연이었다. 아침에 내가 나오는 시각도 그렇고 내가 성남도서관에 가기 위해 구종점을 지났던 것도 놓치지 않고 그녀 시야에 들어왔다는 것이 꺼림칙했다. 분당으로 일을 나가려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 봤을 때는 제법 미인이라고 느꼈었다. 막연하게 한숨이 나올 정도로 허탈했었다. 나와는 전혀 맞지 않거나 어울리지 않는 과분한 여자로 보였었다. 아니 그리고 사실 말이지, 경화였다는 걸 알아도 별수 없었다. 내 쪽에서 절대 아는 체를 안 했을 거란 거지. 일단은 찾아왔으니 반가운 얼굴로 대하기는 했어도 나를 만나기 위해 연차휴가까지 냈다는 것에 감격해주지 않았다. 도대체, 왜? 나를 찾아온 이유가 뭘까. 잘 다니던 회사에 휴가까지 내면서 나를 만나러 올 일이 있었나. 혹여 모르지. 하도 세상이 뒤숭숭하다 보니 개인정보가 새서 사기라도 당해 나를 찾아와 같이 해결해 보려고 상의하러 온 것일 수도 모르지. 나를 잡으러 왔나. 보증을 잘못 서서 돈을 떼일 일이 생겼나. 일부러 태연한 척했다. 하던 일이 있는 곳에서 한 사람이 빠지면 차질이 많이 생길 텐데. 나 만나는 일이 그렇게 중요했나. 그렇지만 직장 일을 걱정해 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녀가 나를 찾아온 것이 은근히 부담으로 이어질 무렵이었다. 나를 찾은 이유만 간단히 말하고 돌아가 주기를 바랄 정도였다. 그녀가 물었다. 얼굴 보고 이야기할 시간이 되는가. 

 “식사라도 같이하죠. 밥값은 제가 낼게요.” 

 “그렇지만 전 지금 할 일이 많이 있어서.” 

 “어머. 제가 방해됐나요?” 

 “아니. 뭐 그런 거는 아니고요.” 

 “그럼. 잠깐 차 마실 시간은 되죠?” 

 “아니요.” 

이방인을 읽던 중이라 한참 집중력이 오를 때였는데…. 이방인이 대순가. 어색하고 대처할 수 없으니 반대로 마음은 삐딱하게 몰아가는 거지. 이런 미인이 나를 찾아와 주었는데 마다할 이유가 따로 있을 리가 없었다. 한쪽 기분은 까무러칠 정도로 좋아 놓고서는. 보면 볼수록 매력적이었다. 버스 탈 때는 자세히 뜯어볼 수가 없었다. 시간에 쫓겨 버스를 타다 보니 서로 눈이 마주치는 것이 고작이었다. 힐끗힐끗 보니 아침때와는 사뭇 달랐다. 그녀 부름에 응하기라도 한다면 엮이는 것 아닌가. 

 “어? 정말요? 저를 피하시는 건가요? 무척 섭섭하군요. 일부러 여기까지 찾아왔는데……. 무지 힘들었어요. 희망대 성남도서관은 언덕에 있어서 올라오기도 등산 같았고, 도서관에서 구둣발 소리 날까 조심하면서 찾아다니는 것도 힘들었어요.” 

 “차 마실 시간 정말 안 되는데. 바쁘거든요.”

내빼려 들었다. 이러한 상태가 오래가는 것은 그다지 좋지는 않다.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그녀의 눈빛이 애절하게 바뀌었다. 잠깐이면 돼요. 나는 시선을 돌렸다. 쉽게 물려서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녀를 보니 여전히 시선은 고정적이었다. 고작 대안을 생각한 것이 술이었다. 그렇게 마주 앉은 걸 상상해 보니 어색하기 짝이 없을 것 같았다. 무겁고 어려운 시간이 계속 이어질 것이다. 극히 짧은 순간이었지만 나와 그녀와의 거리는 수십만 광년 떨어지고 밤과 낮이 바뀌어 지구 반대편에 서 있는 느낌이었다. 나는 서슴없이 지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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