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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규만 Aug 03. 2023

벙거지를 쓴 남자 크로키 1 -1

 1 데생 1 -1

 구종점에서 분당으로 가기 위해 2-1번 버스를 기다렸다. 여자랑 눈이 마주쳤다. 멈칫 놀랐다. 이제는 보면 눈인사를 해야 할 정도로 익숙해졌다. 일을 시작한 지 일주일이 다 되어 가는 중이었다. 요사이 하루도 빠짐없이 얼굴을 마주치는 여자였다. 하루 이틀은 그러려니 했다. 구종점에 서울로 빠지는 유동 인구가 줄잡아 십만이 넘는다고 봐도 여자, 남자 그 수많은 사람 중에서 같은 자리, 같은 시각에 마주치는 경우가 그렇게 흔치만은 않은 일이었다. 여자가 나를 좋아해서 그렇게 서 있을 리는 만무하였다. 여자 스토커일 리는 없을 테고. 설마. 우연이겠지. 그렇게 치부했다. 아무리 그래봤자 막노동하는 처지에 여자에게 아는 체를 하기는 힘들었다. 거기다 매일 옷을 갈아입는다 해도 허름한 작업복 차림으로 서 있기 마련인데 선뜻 자신감 있게 들이대기도 어려웠다. 암만 봐도 모르는 여자였다. 눈이 마주치자 반기는 낯빛이었다가 금방이라도 아는 체를 하러 달려 올 기세였다. 겸연쩍어 눈을 다른 곳으로 바로 돌렸다. 여자와 한동안 같이 눈치 마주친 채 서 있을 수만은 없었다. 딴청을 피우다 또 쳐다보면 여자가 아쉬운지 흐린 눈으로 바뀐 채 날 계속 응시 중이었다. 이건 마치 버스를 타러 나온 것이 아니라 순전히 나를 찾으러 나온 여자처럼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그녀는 행여 나를 놓칠까, 헤매는 동공 같았다. 수많은 사람 틈바귀 -버스가 수없이 가고 멈추는 가운데서도 내가 시야에서 안 보이면 고개를 바짝 들었다가 그 자리에 내가 그대로 있으면 안도했다. 그녀와의 간격은 고작 이 미터도 채 되지 않았다. 시선은 분명 자신이 탈 버스를 기다리는 것 같은데 돌아보면 꼭 날 유심히 살피는 눈이었다. 언뜻 보기에는 서울로 출근을 하는 사무직 여성 같았다. 유난히 화장이 지나치리만큼 화려했다. 너무나 예쁘고 호감이 가는 여자였다. 화장만큼 입은 정장은 지난 며칠 입은 것과는 확연하게 차이가 났다. 스커트가 통이 커 몸을 한 번씩 움직일 적마다 흔들거렸다. 

 버스를 기다리는 아침이 지루하지 않았다. 한 번쯤 말을 걸어 볼까. 나중에라도 내가 일하는 모습을 그녀가 본다면 하찮게 보일 수도 있겠지.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타고 갈 버스가 왔는지 요금을 내고 버스에 오르는 뒷모습이 보였다. 만원 버스에 올라 차창으로 그녀는 내게 시선을 줬다. 좀 전처럼 아쉬운 눈이었다. 차가 출발해도 고개는 내 쪽으로 계속 돌려져 바라보는 중이었다. 그녀를 태운 버스는 서서히 멀어져 갔다. 맥이 빠졌다. 

 내가 타고 갈 2-1번 버스도 그제야 도착했다. 그녀가 탄 버스를 쫓고 싶어질 정도였다. 말은 걸지 못하겠지만 옆에서 버스 기다릴 때처럼 옆에서 바라만 보기만 해도 좋을 것 같았다. 한동안이라도 설레던 것이 사라지고 나니 그렇게 허전할 수 없었다.

 

 공사 현장에 도착하니 남자가 소리를 질렀다. 이제 사 온 거야? 십 분이나 늦었잖아. 십 분이나. 닦달이었다. 어떻게든 좀 더 부려 먹으려는 업자가 야바위꾼으로밖에 비치지 않았다. 시멘트와 모래의 적당 비율로 섞어져 있는 희석가루에 물만 잘 맞춰 주어 반죽 통에서 전기모터로 개어 통을 조달했다. 가끔가다 나도 배워 보라는 식으로 망치와 타일 몇 장을 줬다. 타일 틈 사이에 시멘트반죽을 메워 넣고 톱밥 가루로 마무리하는 과정은 힘에 부쳐 허리가 끊어질 정도로 아팠다. 아무래도 쪼그려서 앉아서 하는 일이라서 그런지 요령이 있어야 하는가 보다. 업자가 형님이라고 부르는 또 한 사람의 숙련공은 콧수염이 제법 멋들어지게 보였는데 별반 힘들 거 없이 톱밥을 이리저리 굴리며 꽤 능숙하게 일을 깔끔하게 처리했다. 내가 그렇게 힘들게 뛰어다니다시피 헉헉거려도 그는 항상 여유 만만해 나와는 엄청 대조적이었다. 그 숙련공은 일이 너무 쉽고 간단한지 한 번도 얼굴이 찌그러져 보인 적이 없었다. 삼십 평짜리 아파트 베란다가 내 눈에는 오백 평, 천 평처럼 넓어 보였다. 일은 보조가 스스로 다 하고도 시간이 남아도 훨씬 많이 남아돌아야 하는데. 일하는 것이 왜 그렇게 시원찮아. 군대 제대하고 바로 온 거 맞아? 힘이 없어. 하청업자는 재료를 조달하고 나를 봤다. 그는 일하는 현장에는 거의 있는 적이 없었다. 일하는 층이 각기 달랐다. 

 허리가 쑤셨다. 더 이상 오래 앉아 있을 수 없었다. 허리를 한 번씩 펼 때마다 이제 막 여름을 시작하려는 파란 하늘을 보았고 축축하게 젖은 등으로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땀을 식히는 동안 아파트 베란다 사이로 학교가 보였다. 청색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저희끼리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들 재밌게 하는지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소리가 일하는 곳까지 들려왔다. 알고 보니 토요일 오후였다. 학교생활의 향수가 스쳐 갔다. 나 때는 교복 자율화가 시행된 지 한참 지난 연후였다. 그러면 뭐 해. 옷이 없어 형이 입던 옷을 그대로 물려받아 입던 시절이었는데. 군대를 다녀오니 세상이 바뀌었네. 학교장 재량에 따라 교복도 학교마다 조금씩 다르게 입을 뿐이지. 하긴 군대에서도 국방색 민짜 단색 군복이었다가 예비군복과 비슷한 개구리 무늬로 바꿔 입으라고 나눠주던 때였지. 입던 옷이 달라지면 분위기가 좀 달라지나.

 “뭐 해? 아직도 팔 층이야? 그리해서 때맞춰서 집에 가 보겠어? 엉?” 

언제 왔는지 하청업자는 또 닦달이었다. 후다닥 움직였다. 괜한 옷 타령은. 창밖으로 애들 옷을 바라보다 손이 느려졌다. 일을 오래 하지 못할 것 같았다. 무조건 눈앞의 이익에만 혈안이 되어있는 건축업자에게 실망만 느껴졌다. 군대같이 획일적이고 반복된 일에 염증을 느끼고 진절머리 치던 내가 그 일을 오래 하기에는 정말 힘들었다. 사실은 정신적인 것이 더 결부되어 있었지마는 업자에게는 건강상의 이유를 들고 그만두려는 의사를 내비쳤다. 진득하니 배겨 낼 타당한 이유나 의지가 서지를 않았다. 

 일당을 월급식으로 계산해, 한 달씩 끊어서 지급한다. 업자가 말했었다. 일이 끝난 저녁에 나머지 도구들을 정리할 즈음이었다. 그만하겠습니다. 그는 예상했었나 보다. 군말 없이 며칠 일한 것을 정확히 알고 돈 가방을 뒤졌다. 허리춤에 차고 다녔던 것이 돈 가방이었구나. 6일 일했지? 하루 일당 삼만 오천 원씩, 자 옜다 돈. 에누리 없이 계산해 주었다. 하청준 윗선에서 일급으로 주기에 가방을 매번 차고 다녔나. 아니면 나 같은 일머리 부족한 사람을 데려다 쓰다가 금방 그만둘 걸 대비해 현금을 항상 지니고 다니는 건가. 

 집에다가는 적당한 핑계를 둘러댔다. 다른 일을 좀 찾아봐야 할 것 같아요. 와? 또 그만뒀나? 네가 매일 하는 늘 그렇지. 돈 21만 원을 건네받으면서 어머니는 못마땅한 눈초리로 나를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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