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데생 1 -11
“맨 처음 언중 씨를 보았을 때 저도 금방 알아본 거는 아니에요. 버스정류장에서 그렇게 며칠을 두고 보게 되니까, 차츰차츰 어느 기억 속 한편에서 떠오르는 거예요. 차차 어느 기억의 향기가 스며들어 가듯이. 마치 재스민 향처럼요. 언중 씨를 알아보게 되자 바쁘게 사는 모습이 좋았고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가. 구체적으로 알고 싶었어요. 그래서 이렇게 만나게 된 거지만요. 전요. 언중 씨한테 범준 씨가 소중한 추억의 한편으로 간직되면 좋겠어요.”
감정선을 개입해 물어봤을 적의 때와는 달리 꽤 누그러진 그녀의 말이었다. 곤두세우고 피하려 들었던 그녀였었는데. 이제는 대놓고 범준을 말하고는 있었지만, 추억으로 덮으려 들고 있다. 여자의 속이 궁금했다. 궁극적 확연한 속내를 드러내 보여 준다면 이렇게 답답해하진 않을 텐데. 묻고 싶어졌다. 범준이는 그저 추억일 뿐인지. 하긴 그녀의 말이 틀리지는 않았다. 얼굴도 다시금 볼 수 없는 마당에 추억으로라도 있다면 다행이겠지.
“그래요.”
이내 무료해지고 말았다. 동공이 천천히 흐려졌다.
누군가 기억할 수 있는 편린. 찌꺼기. 찻집에서 ‘조 하문’ 노래가 흘러나왔다. 같은 하늘 아래 있었지. 그 아래 경화를 보니 얼마나 행복한가. 언중이 너는 모를 거다.
같은 하늘 아래.
자신이 있는 곳은 미국 땅이니 같은 하늘 아래가 될 수가 없는 거였다. 경화에게는 수십 번씩 편지를 썼었다. 답장이 없다. 그의 편지는 온통 경화 이야기였다. 나는 편지에다 썼다. 경화를 한 번 만나보겠다. 어차피 멀리 떨어져 있는 상태에서 편지란 게 가당키나 하겠나. 어쩌다 가끔 만날 수도 있는 것도 아니고 기약도 없으니. 그리고 궁금했다. 나한테까지 이렇게 경화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했다면 경화에게 쓴 편지는 또 얼마나 더 구체적이고 아름다운 그리움이었겠는가. 주소가 잘못돼서 편지를 못 받은 건지, 마음에도 없는 사람이었는데 자꾸 편지를 써서 그런 것인지, 만날 기약도 없는 사람한테 답장 같은 걸 써 보았자 학교 다닐 때 국군장병 아저씨께 쓰는 편지처럼 선생님이 강요한 작문 숙제를 하는 기분이었는지를 –알고 싶었다.
경화가 다니는 화실에 찾아갔고 그녀에게 범준이 그린 엽서를 건네며 편지를 써 달라 부탁했었다. 짧은 만남이었다. 금방 스친 얼굴이라서 누구라고 말하지 않으면 기억도 못 할 뻔했다. 그만큼 경화에 대한 나의 기억은 희미했다. 지금 그게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범준한테 답장하여 계속 편지가 오고 갔나. 딱 한 통으로 끝난 건가. 미국에 있을 건데 한국을 그만 잊어라. 자신 의사를 정확히 피력한 것인지. 그에 관해 물어볼 엄두가 나질 않았다. 인사동에서 밥을 먹기 직전 대화같이 낭패를 보는 건 아닌가.
경화를 보고 기분이 조금 나아진 것 같았다. 그렇지만 버스를 타고 스쳐 가는 풍광이 기억의 연쇄로 이어졌다. 나 자신 십 년 전후의 모습을 순간순간 발견하면서 힘들었다. 마치 나는 타임머신을 탄 기분이었다. ‘백 투 더 퓨쳐’의 마티 같이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것 같아도 나는 그처럼 신나지는 않았다. 영화에서처럼 사랑 고백을 받거나 예전 친구들을 만날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나와는 별개로 상반되어 여전히 어둡고 침침했다. 그와 그림을 그리던 때가 그리워 애써 참았던 감정이 복받치고 콧날이 시큰해졌다. 그만 눈물이 핑 돌았다.
잠실역 부근 트레비분수 앞에 범준이 보였다. 지하철 개찰구에서 표를 나한테만 주고 자신은 없어서 다른 사람들 눈치를 보며 훌쩍 뛰어 넘어섰다. 지하도의 자판기에서 콜라를 뽑아주다 콜라만 나오고 잔은 안 나오는 것을 보고 그가 안절부절못하던 모습이 선연히 그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