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데생 1- 12
성남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차오른 눈물을 얼른 닦아냈다. 경화가 본 것 같았다. 그녀의 눈길이 와닿았다. 잠실역에서 추억의 포텐이 터졌다. 친구들과 나를 비롯한 인연들이 하나같이 스치지 않는 것들이 없었다. 잠재돼 있던 기억의 세포들이 하나하나 일깨워 요동치자, 한꺼번에 무너져 내렸다.
슬프고 아팠다. 경화한테 창피했다. 찔끔 찍어내는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 급작스레 눈물이 흘러내려 소매로 훔치는 동안 그녀가 말이 없었다. 그렇지만 최대한 안 본 거처럼 감추려 애썼다. 성남으로 돌아오는 내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들을 수 없었다.
내가 버스 안에서 뒷좌석에 앉아 고개를 돌려 추슬렀다. 경화는 모른 척이었다. 머리를 돌린 뒤통수만 봤다.
송파를 지나고 경원대를 거쳐 금방 버스는 성남시청에 다다랐을 때였다. 그녀는 신흥동인 종합시장에서 내릴 채비를 하며 일어섰다. 나도 얼떨결에 일어났다가 같이 따라 내렸다. 경화가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말했다.
“원래는 집이 은행동이에요.”
“그런데 왜 거기서 내렸어요?”
“언중 씨와 처음 만났던 화실을 들르고 싶어서요. 고교 시절도 생각이 나고 예전 선생님들도 그대로 계시는가, 만나고 싶어서요.”
“그럼, 그동안 한 번도 안 가봤던 겁니까?”
“네. 그랬죠.”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녀가 변명하듯 내게 설명도 없었다. 나는 별로였다. 내키지 않았다. 그녀를 좇아가도 처음 봤을 때와는 달랐다. 고무적이었으나 지나고 보니 한발 뒤로 물러난 상태였다.
지금 가면 학생도 없고 한가할 시간인 거는 나도 알고 있었다.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아니 그보다는 저는 이만 가보든가 할게요.”
“기왕 여기까지 온 것이니 같이 들어가죠.”
그녀가 건물 입구에서 화실 쪽으로 손짓하고 더없이 해맑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버스 안에서 내가 그녀에게 보여줬던 모습이 한심해졌다. 창피했다. 가볼게요. 나는 고개를 여러 차례 도리질했다. 알고 보면 여기도 범준의 추억이 고스란히 담긴 곳이었다. 그만하련다. 여기까지 오다니. 그녀의 좀 전과는 달리 애처롭게 눈빛이 바뀌었다. 그녀가 나를 쳐다봤다. 달리 방도가 없었다. 눈을 감았다. 한숨을 쉬었다. 작정하고 들이대는구나. 저걸 어떻게 당해내. 계단에 올라섰다. 그녀의 표정이 확 달라졌다. 금방 피어올랐다. 여자의 표정은 가지각색으로 일백 가지도 더 되는 것 같았다.
둘이 화실에 들어서니 상담실에서 검은 테 안경을 쓴 사람이 얼굴을 내밀었다. 부스스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어딜 가나 티가 났다. 그림 그리는 사람은 다르지 않았다. 며칠 면도도 안 했는지 얼굴이 털투성이였다. 세상에. 다른 건 몰라도 삐져나온 코털이나 좀 깎지.
“어? 이게 누구야? 경화 아니니? 무심한 자식. 한번 찾아오라고 그렇게 전화해도 안 오더니 이제 사 왔구나. 웬일이야? 무슨 바람이 불어서.”
“네, 선생님. 정말 죄송해요. 직장생활을 한다고 보니, 여의치가 않아서요.”
“그래. 아무튼 잘 왔어. 지금이라도 이렇게 찾아주니 고맙지 뭐. 그래도 모두 있을 때 찾아오지. 지금은 혼자뿐이 없는데.”
경화가 선생님이라고 말한 그가 나를 의식한 듯, 경화에게 궁금한 눈빛을 보냈다.
“아, 참! 언중 씨 인사드리세요. 여기 원장 선생님이셔요. 그리고 선생님. 예전에 같이 그림 그렸던 범준 씨 기억하시죠?”
“알다마다, 미국 갔잖아.”
“같은 학교 미술부 동기 김 언중이랍니다.”
“그래? 그럼, 이 친구도 그림 그리는 친구야?”
갑작스러운 경화의 소개로 멋쩍어하며 그에게 얼떨결에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원장이 자꾸 계속 볼 거처럼 친한 사이같이 물어봐서 건성건성 대답했다. 곤혹스러운 자리였다.
“그림은 그리지만 취미로 합니다. 전혀 다른 일을 해요.”
“그래도 그림쟁이가 그림으로 먹고살아야지. 무슨 소리야? 무슨 일 하는 데 그래?”
힘들어졌다. 이야기가 길어지고 다른 사람들이 하던 똑같은 이야기들을 반복해 대면 쉬이 지친다. 핵심이 뭐가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인상을 찌푸리고 심기가 불편한 것을 드러내려는 참에 경화가 눈치를 챘는지 수습에 나섰다.
“원장 선생님. 저 오랜만에 왔는데 뭐 아무것도 없나요? 커피라도 좀 주시지.”
“아. 그렇지. 내 정신 좀 봐. 커피포트에 물 좀 올리고.”
그 틈에 슬그머니 일어나 원장 시야에서 멀어졌다. 나는 얼른 그림을 보고 싶다는 핑계를 둘러대고 화실에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데생 실에 전지 화판에 아폴로가 목탄으로 그려져 미완성작으로 대기 중이었다. 주위에 혹시나 경화의 그림도 있을까. 찾아보았지만 그녀의 머리글자가 들어간 그림은 없었다. 원래 화실에서는 현 입시생 위주의 전시가 상례였다. 고교 시절을 상기했다. 그녀의 데생 한 장이 차츰차츰 뇌리에서 그려졌다. 줄리언이었다. 화실만의 독특한 풍이 있는데, 그 양식을 따라가면서도 절제적으로 봤었다.
“뭐해요?”
뒤에서 방금 타 왔는지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커피를 경화가 권했다.
“아…, 그냥요. 아폴로 그림이 어떤가. 자세히 살펴보는 중이었습니다.”
“그래요. 그림 너무 좋죠. 커피 맛도 좋고요.”
나는 경화의 '커피 맛도 좋고요.’ 말에서 묘한 뉘앙스를 느꼈다. 너무 오랜만에 만끽하는 그런 기분이었다. 나도 얼른 동의해 주지 않으면 후회할 거같이 재빠르게 말했다.
“그러네요.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 지는군요. 커피처럼 향기롭고 꿈이 많던.”
“돌아가고 싶어 지나요? 그러면 여기로 오세요. 제가 배우던 곳으로요. 저도 자주 들러서 언중 씨가 그림 그리는 거 볼게요.”
“이런! 그 이야기가 아니었는데요. 그냥 전 친구들과 함께 지내던 시절을 말한 건데요. 뚜렷하게 자리 잡히면 그림 그릴 겁니다. 아직은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