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데생 1 -13
“네에….”
경화는 못 내 아쉬운 표정이었다. 그림 그릴 계획은 정말 없었다. 초조하게 쫓기는 것이 싫었고 여태 가족에게 내비쳐진 모습들이 결코 노력하면서 보여 준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안이하다고 말하면서도 아무렇게나 살았다. 경화가 나를 왜 화실로 데려왔는지 이제 사 감을 잡았다. 둔했다. 그래도 그림을 했다, 낭패를 보는 거는 또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경화의 제안이 탐탁지 않았다. 그녀는 대단히 서운하게 나를 쳐다봤다.
화실에서 나왔을 때 경화가 나를 자꾸 곁눈질로 쳐다보았다. 할 말이 있는 것 같았다. 성호시장을 벗어나 종합시장 쪽으로 가는 다리 부근이었다. 그녀는 대단히 진지해진 표정으로 나에게 말했다.
“언중 씨….”
“네?”
“인사동 근처에서 저한테 범준 씨에 대한 저의 감정을 물어보았었죠?
“네.”
“저어…, 제가 제대로 대답 못 한 거는…. 언중 씨를 많이 생각했거든요.”
“뭐가요?”
무슨 의미인지 확실히 알 수가 없었다. 내 생각을 많이 했다는 것이 도대체 이해가 안 됐다. 경화가 머뭇머뭇하다 잠시 침묵으로 일관하였다. 그러다 계속 다음 말을 기다리면서 쳐다보는 나의 부담스러운 시선을 의식한 듯 비로소 입을 열었다.
“언중 씨가 고등학교 때 화실을 다녀가고 인상이 너무 남아서 저는요. 사실…….”
8차선 도로 옆이라 네거리 앞에 신호 대기 중이던 차들이 옆으로 쏜살같이 지나가자 경화의 말도 같이 스쳐 지나갔다. 계속 경화는 뭐라고 하는 거 같았는데 난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중요한 것은요. 이렇게 언중 씨를…….”
“어? 저게 뭐지? 백차네?”
마침 교통순찰차가 옆을 스쳐 가서 일부러 딴청을 부렸다. 어색하게 같이 걸으면서 몇십 분의 시간이 흐른 거 같았다. 어느새 종합시장 반대편에 주로 상대원으로 들어가는 버스가 서는 정류장에 이를 때였다.
“버스가 왔거든요. 다음에 기회가 되면 봐요. 이만 가볼게요.”
“잠깐만요. 언중 씨….”
갑자기 허둥지둥 서둘러서 간다고 하다 획 돌아섰다. 아쉬운 눈빛을 보내며 자꾸 나를 부르는 그녀를 뒤로한 채, 인사도 없이 종합시장에서 버스를 탔다가 종점까지 갔다. 너무나 순간적이었다. 짧았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우리 집까지 가는 버스는 33-1뿐이 없었다. 깜박 존 것도 아닌데 제정신이 아니었다. 운전기사가 소리를 쳐서 그제야 종점인 줄 알았다. 여 봐요! 빨리 내리세요. 종점이라니까. 초저녁부터 술을 자셨나.
제2공단 도로를 터덜터덜 걸었다. 경화의 말이 귓가에 맴돌고 갑자기 머릿속이 텅 빈 채 멍해져서 내가 어디를 걷고 있는지조차 분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무작정 걷다 보니 어느 사이에 집 근처에 이르렀다. 한참 만에야 내가 온 곳이 어디인지 알 수 있었다. 어둑해진 아파트 놀이터에서 그네에 몸을 기대고 삐걱거리며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발을 굴렀다. 보안 등불 빛에 검은 내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짧아졌다. 무심코 지나쳐 온 세월이 아득하게 멀어지고 한참을 그 시간에 대한 그리움들에 파묻혔다. 일에 빠져서 열중하다 전혀 어떻게 되었는지 몰라 상실되었던 다른 시간이 한꺼번에 몰려와 감당하기 힘들어졌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마음 가볍게 경화를 볼 수 없는 생각이 들었다. 꽤 오랫동안 집에 들어가지 않고 놀이터 주위를 배회했다. 버스정류장에서 아쉬운 눈길을 보내던 경화가 자꾸 떠올랐고 이내 범준이 그리워졌다. 이것이 나의 추억의 전편이라니.
내일부터 일이나 나가 봐야지. 답답하도록 가슴속이 무겁게 짓눌러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