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데생 1 -14
경화와 서울을 갔다 오고 나서 줄곧 비만 내렸다. 하늘은 흐리고 맑은 날이 거의 없었다. 비가 유리 창문을 적셨다. 방들이 눅눅하고 습기 찬 것이 냄새가 났다.
집으로 경화한테 전화가 걸려 왔다. 처음부터 그녀일 거라 확신이 찼다. 어머니가 수화기를 들었다가 놨다. 뭐꼬? 와 말도 없이 끊노? 장난 전화하면 죽여뿐다. 말이 없으니 넘어갔다. 두 번째는 내가 받았지만 목소리를 알아듣고 경화라 끊었다. 여보세요. 거기. 언중 씨네 집이죠. 다음에는 형이 받았다가 나를 바꿔 주려 했다. 아니야. 아니야. 손사래를 쳤다. 여자야? 응 여자 같은데. 계속 없는 걸로 해줘. 모질지만 이제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자꾸 그 속으로 빨아들이려는 과거들이 머뭇거리게 시간을 좀먹었다.
담배를 사러 편의점에 갔다가 군대 가기 바로 직전이 스멀스멀 떠올랐다. 그때까지도 나는 범준과 편지로 소통 중이었다. 대학에 떨어지고 재수를 할 무렵이었다.
모란 쪽에 있는 용역회사를 나갔다. 그나마 몇 안 되는 일거리도 숙련공이나 그만큼 연배가 있는 사람들만 뽑혀갔다. 태풍 -로빈이 계속 북상 중이라서 제주도는 벌써 영향권에 들어갔다고 아침부터 14인치 텔레비전에서 떠들었다.
비. -참혹한 여름의 시작이었다. 잔인함은 한없는 나락으로 밀어붙였다. 일을 했을 당시에 여름 한낮에 뜨거운 뙤약볕도 참을 수 없었지만, 소개소에서 일자리를 얻지 못하고 그냥 앉아 있는 것이 더 힘들었다. 가슴이 타들어 갔다. 신세타령이라도 오지게 늘어놓을 판이었다. 비 오는 날이 이어지다 보니 초조함이 따라다녔다.
나도 그랬지만 한쪽 구석 육십을 넘겼다던 노인의 한숨이 절정으로 치달았다. 후유.
“쌀 떨어졌어. 집에 쌀이 없어. 일을 좀 줘.”
하지만 젊은 소개 꾼은 책상 앞에서 전화만 받을 뿐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같이 일을 못 나가고 초조하게 담배만 빡빡 피워 대던 한 사내는 다그치듯 말하였다. 이제는 그 말은 지겨워. 레퍼토리 좀 바꿔 봐. 그래서 일을 맡기겠어. 말이라도 그럴싸하게 꾸미기라도 잘해야지. 이거 원.
아침에는 되도록 일찍 일어났다. 늦잠이라도 늘어지게 자면 큰일이었다. 남의 집 가서 일을 하는 어머니한테 행여 들키기라도 한다면 난리가 날 것이다. 일어나자마자 베란다 창밖을 내다봤다. 새벽부터 내린 비가 그치지 않고 이어져 무척 신경이 쓰였다. 심상치 않았다. 축대라도 갑자기 무너져 내리고 떠내려가는 것 아닌가. 산 가까이에 지어진 아파트라 고도가 꽤 높은 편이었다. 비로 흐릿한 창문 너머로 가게가 보였다. 카페인지 호프집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었다. 개점한 지 얼마 안 된 것 같았다. 간판명이 보였다. 비 온 뒤 ‘be on D’의 네온사인으로 번들거리는 불빛이 희미해졌다. 비가 쏟아지니 어둑했다. 한낮에도 불을 끄지 않고 그대로 둔 것이 보였다. 천둥이라도 치면 벼락 맞지 않을까. 불안한 것이 건들건들해 보였다.
be 동사로 지칭할 때 쓰는 용어를 발음대로 be와 전치 대명사 on과 달랑 외자 d. 나름 기발했다. 의미하는 바가 없으니 가볍게 보았다. 크게 무리는 없었다. 광고적인 면에서 눈길을 잡아끌었다. 그거는 인정한다. 그렇기는 해도 어차피 비와 관련된 일이 대부분 엉망진창인 것이 많다. 그 기분을 나타낼 때 비 온 뒤라는 발음 나는 대로의 철자가 바로 내 기분을 적나라하게 대변해 주었다. 비 때문에 나는 막일조차 못 나가고 집에서 빈둥거리고 있으니 말이다. 비가 온 뒤라도 술로 엉망진창 취해보자는 말인가. 그래. 지금 내 기분은 말할 수 없이 엉망진창이야.
창밖을 바라보고 있자니 가게 옆에서 그렇게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우비를 차려입고 일하는 사람을 보았다. 신문 가판대에 비닐을 씌워 가지런하게 정리했다. 악착같았다.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었다.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처량할 정도였다. 신문을 정리하는 것이 치열한 삶을 보여 주었다. 그래도 배달원이 부러웠다. 비를 출출 맞으면서도 신문 가판대에 무료 신문을 한 다발을 꽂아 놓고 가는 모습이 나를 주눅 들게 했다. 저 사람이 열심히 살 동안 나는 지금 무얼 하는 거지?
생존의 섭렵이었다. 그렇지만 무분별하고 거칠 바가 없었다. 옴짝달싹 못 한 채 웅크리고 허연 벽만 바라봤다. 벽지 표식은 일정하게 이어지는 것 같아도 있다 보면 갖가지 형태로 무수하게 태어났다. 가고자 하는 방향에서 번들거리다가도 돌진하여 비껴갔다. 선은 한 겹씩 한 겹씩 쌓아졌다. 튀어 오르기도 하고 구석으로 눈을 돌렸다가 제자리로 오면 가라앉았다.
딱히 연락을 취해 온다거나 아니면 오히려 누군가가 싸움이나 시비를 걸어온다든가 하는 일들이- 얼른 생각할 때는 그게 좋은 거는 아니지만- 그러한 사소한 일조차 없다는 자체가 힘들었다. 집에 틀어박혀 있으니 다른 사람과 부대낄 일조차 없었다. 전과 똑같은 상황으로 돌아왔다. 창밖으로 때리는 희멀건 빗줄기를 보자마자 ‘비온디’를 외쳤다. 비가 온 이후에 움직일 것이다. 아예 집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는 일조차 없는 날이 다반사다. 날이 거듭될수록 어머니한테 시달렸다.
“야. 사지가 멀쩡한 놈이 뭐가 아쉬워 그러고 있어? 밖에 나가봐라. 내가 너 꼬락서니 보면 울화통이 터진다. 빨리 나가. 제발.”
“어머니. 좀 몰아치지 마세요. 저라고 이러고 싶어서 그러겠어요? 일 나 가면 될 거 아녀요.”
“공장이라도 들어가. 날품 팔아서 하루하루 일하는 거는 몸만 상하고 돈도 모으기 힘들다. 그냥 돈은 적더라도 네가 한 곳에 꾸준히 일하는 곳에 있으면 안 되겠니?”
“가뜩이나 하고자 했던 것도 안 되는데 이러니까, 힘들어요.”
능글맞게 어머니한테 궁한 소리를 하는 중이었다. 그렇게 해 봤자 더한 모질음이 들려오고 거한 폭탄이 떨어질 텐데. 가만히 있는 것이 어머니 화를 돋우는 일 없이 가라앉게 만드는 일인데. 같이 맞서지를 말아야 했다. 네가 하려고 했던 것이 뭔데. 도대체 뭐냐고. 아비나 자식새끼나 매일 쳐들어 앉아서. 저리 놀고 있으니. 나한테 미안하지도 않나 말이다. 하루하루가 전쟁이었고 지옥이었다. 풀리는 일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