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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규만 Jul 25. 2023

2009년 3월 25일-나의 취직 인터뷰

-마지막 도서관의 향기


도서관이다. 오늘은 다른 도서관이다. 죽전 단국대이다. 분당에 구미도서관보다 훨씬 멀다. 오는데 많이 걸은 거 같다.

여기는 컴퓨터를 쓰는데 제한도 없어 오래 써도 될 듯하다. 관리하는 사람이 올지 모르겠다. 너무 오래 앉아 있다, 눈치를 줄까 불안하다.

어제 일자리를 알아보려 벼룩시장 신문에 분당 오리역 근처 휴대전화 부품 조립 공장을 봤다. 나이 제한이 있다. 35세까지. 일단 전화를 걸어볼 참이다. 안 된다고 했을 때 대비해 한 곳 더 봐 둔 곳이 있다. 월 일백만 원을 주는 분리수거장 광고였다. 죽전 단국대학교 안에 상주해 있는 곳이었다. 아직 문의는 안 해봤다. 이렇게 계속 도서관에 있는 건 며칠 버티지 못한다.

부품 조립 공장에 아침 여덟 시부터 전화하니 신호만 또르르 가고 받지 않는다. 일하는 공장이라 출근을 아직 안 한 모양이었다. 조금 있다 해봐야지.

여기 분위기는 웅장하고 무겁게 다가오지만 날씨가 추워서 그런지 썰렁하긴 하다.

아침에 좀 일찍 여섯 시 반쯤인가 일어났을 때 밥을 먹고 욕탕에서 대충 씻고 나오니 어머니가 도시락을 봉지에 싸서 넣어둔 뒤였다. 도시락 싸지 마세요, 했다간 어머니한테 벼락이 떨어질 것이다. 와? 그만뒀나. 왜 또 그만두었나? 그걸 풀라고 할 수도 없고 해 얼른 나갈 채비를 차렸다.

오늘은 일자리를 여기저기 알아보려고 한다. 그리고 시간이 되면 다녔던 직장에 퇴사 처리를 해야한다. 안하면 고용공단에서 여러차례 연락이 올 것이다.

가방에 ‘호밀밭의 파수꾼’과 ‘위대한 개츠비’와 여러 가지 필기할 거리를 쓸 노트 한 권과 도시락을 챙겼다. 어제 본 가판대 광고 신문지를 넣으니 가방이 무거웠다. 일하러 나가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공부하러 가는 것도 아니고. 어머니는 한심한 눈초리였다.

큰일 한다. 뭐 하러 가는 데 가방에 잔뜩 넣어가나?

밖에 나왔을 때 점퍼 안쪽에 입은 셔츠의 운동복같이 나온 모자를 덮어쓰고 나왔다. 3월이 워낙 변덕이 심한 날씨라 적응하기가 힘든 편이다. 상당히 추워 몸을 움츠렸다.

분당도서관을 향하던 발걸음을 멈추고 신문에서 봤던 곳에 전화했었다. 그리고 발걸음이 죽전 단국대학교로 바뀐 것이 계기가 된 거 같다. 분리수거장이 단국대학교 근처로 나왔다. 휴대전화 조립공장은 되면 좋고 아니면 그만이고. 안 될 가망성이 크다.

걷다 보니, 죽전 아파트 근처에 출근을 서두르는 몇몇 사람들과 삼삼오오 짝을 지어 등교하는 학생들이 보였다. 교복 차림의 고등학생과 초등학생들이었다.

갑자기 예전 생각이 났다. 한 벌써 칠팔 년 전쯤 일인 거 같다. 마트 아르바이트로 일을 하다 그 일마저 진력났다. 그만두고 어렵게 용인 고속도로 근처 유통분류센터에 취직이 되었지만, 월급이 너무 적었다. 일요일만 쉬고 꼬박 한 달 일하면 구십오 만원인가 했다. 내가 이 정도밖에 안 되는구나. 한탄했었다. 그곳 일이 그렇게 공장에서 일하는 거처럼 빡빡하게 돌아가는 곳이 아니었지만, 월급이 너무 적으니 일하는 몇몇 사람들은 식대도 아끼려고 도시락을 싸서 다녔다. 식대까지 포함해서 구십오만 원을 받으니 허탈했다. 한 달 꼬박 일해서 차비 쓸 거와 용돈 조금 제하고 보니 어머니께 드릴 돈이 팔십만 원이 겨우 넘었다.

고등학교까지 지겹게 도시락을 쌌는데, 이렇게 회사 다니면서까지 도시락을 싸야 하는 거니. 그래도 꾸준하게 오래 다녀 주면 좋겠다. 또 얼마 하다 관두지 말고.

두 달인가 일하고, 석 달째 접어들 즈음에 그곳 책임자에게 퇴사 통보를 하고 나왔다. 그만두었다, 말을 못 해 집에서 도시락을 들고 나와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려 했었다. 아침 생각은 그랬다. 도시락을 그냥 버릴 수도 없고, 집에 들어갈 수가 없어 분당 미금역에 내려 탄천 쪽에 앉아 도시락을 까먹고 있을 때쯤이었다. 탄천에 개울가에 앉았을 때는 날씨도 좋았고 소풍 나온 기분처럼 꽤 괜찮았다. 그대로 기분을 만끽하고 이어가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혼자 밥 먹는 자체가 묘하게 우울한 쪽으로 기울어 갔다. 그러다 밥이 목구멍에서 넘어가질 않고 목이 메 켰다. 막 눈물이 쏟아지는데 걷잡을 수가 없었다. 눈물이 계속 흘러내렸다. 왜 이렇게 인생이 힘든 걸까. 한순간도 쉬운 게 없었고 순탄한 것이 없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눈물과 같이 밥이랑 꾸역꾸역 삼키었던 것 같다.

그 눈물의 도시락이 오늘 아침 새록새록 떠올라서 힘들게 하는지 모르겠다. 아마 꽃샘추위와 -학생들은 수없이 오가고 많았지만, -넓디넓은 대학교 전경이 쓸쓸해 보여 그런 것인가.

전화했다. 휴대전화기 조립공장에 전화했는데 통화 중이었다. 틈을 두었다, 다시 했더니 젊은 남자 목소리였다. 나이가 어떻게 되시나요. 서른아홉입니다. 됩니까. 서른다섯 이후는 뽑을 수 없습니다. 나이 때문에 문제가 되니 어쩔 수 없습니다. 회사 방침입니다.

주로 여자들을 구인하는 회사이고 남자는 모집하지 않는 공장이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던 터였다. 그래서 신문에 한 곳을 더 훑었던 것이고 그쪽으로 마음이 갔다.

날씨가 쌀쌀해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건물 안을 찾았다. 카페나 음식점이라 들어갈 수가 없어 밖에서 약간 추위에 몸서리쳤다. 그러다 버스정류장에서 멈춰 서서 가방을 뒤져 광고 신문을 꺼내 보고 분리해서 수거하는 곳의 번호를 눌렀다. 전화를 받은 남자는 나이를 물어보았고 집이 어디인가 물었다. 거리낌 없이 대답했다. 서른아홉이고 죽전 동성아파트입니다. 그리고 지금 단국대학교 근처에서 전화한 거거든요. 바로 찾아뵈고 인사드리려고요.

남자는 그곳이 어디쯤인가, 쭉 설명을 늘어놓았다.

단국대학교 근처이시면 정문에서……, 오른쪽으로 쭉 올라오시면 주차타워가 보이고요. 그 길로 좀 올라오면 분리수거장이 보이거든요. 거기서 김 부장님 찾으시면 돼요.

네. 대답은 했는데 중간에 버스가 오는 차 소리 때문에 감이 멀게 들려 확실하게 못 들은 부분이 있었다. 금방 찾겠지. 개의하지 않고 무작정 아스팔트 길을 따라 오른쪽으로 올라갔다. 주차타워 같지는 않고 새로 들어서는 건물을 짓는 곳이었다. 철재 빔으로 높게 지어놓은 임시 건물이었다. 이 양반이 이 건물을 보고 주차타워라고 말했나. 올라가다 막혔다. 그 담부터 분리수거하는 장소는 보이지 않고 새로 칠을 했는지 페인트 냄새도 채 가시지 않은 새로 지은 원룸만 즐비하게 있었다. 오른쪽을 바깥쪽에서 본 것과 안쪽에서 본 걸 잘못 말했나. 헤맸다. 왼쪽으로 올라가 보아도 거긴 아예 주차타워 비슷한 것도 보이지 않았다.

한 번 더 그곳에 전화했다. 학교 안으로 버스 종점이 있다. 전 통화 때 자동차 소리 때문에 귀담아 못 들었던 부분이 그거였다. 학교 안 좌석버스 종점 말이다. 그곳에서 바로 조금만 올려다보면 분리수거장이 바로 보인다. 정문을 지나 언덕을 올라갔다. 마치 예전 성남의 신구전문대 전경이 생각이 나기도 했다. 간혹 지나가는 버스를 쫓아서 화려하게 높게 지은 학사를 지나 한참을 올라갔다. 산을 깎아서 지은 학교 건물 안이라 언덕이 꽤 높았다.

드디어, 버스 종점을 지나, 컨테이너 두어 개가 보이고, 양철로 막아 놓은 그렇게 찾아 헤매던 ‘○○환경’ 페인트 글씨가 보였다.

“안녕하세요. 아까 전 전화했던….”

“아네. 김 부장님! 왔어요. 저쪽에 김 부장님이거든요.”

나를 맞이한 사내는 일을 하다, 김 부장을 불렀다. 김 부장은 한쪽에서 분리수거를 한참 동안 직원들이랑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반갑게 맞았다. 컨테이너 안으로 안내했다. 김 부장은 검은 테 안경을 썼고 흰머리가 펄펄, 날렸다. 나이가 많이 먹어 보였다. 마치 예전에 내가 ‘피시방에서 생긴 일'을 집필했을 당시 피시방에서 일했던 김 부장 유형이랑 너무 닮았다. 매부리코에 검은 테 안경까지 말이다. 근데 이 사내는 그 김 부장보다 훨씬 늙어 보였다. 하긴 벌써 피시방 일이 나한테는 십여 전 일이니, 그 사람을 지금 만난다면 지금 만난 김 부장하고 거의 동년배쯤 되지 않았을까. 김 부장은 내게 막대 봉지 커피를 건넸다. 그가 다른 봉지를 뜯으려 하길래 내가 종이컵에 물을 받아 커피를 탔다.

김 부장은 마찬가지로 나이와 거주지가 어딘지 물어봤다. 통화한 양반이 말 안 해 주었나. 서른아홉, 동성아파트. 오늘 나이로 거덜을 내는구나.

이런 일을 할 수 있겠나. 개의치 않는다, 일은 많이 해보았다. 길게 늘어놓고 싶지 않았다. 이 사람은 나의 첫인상을 보더니, 굉장한 기우로 받아들인 거 같다. 과연 이런 일을 할 수 있는가. 일은 힘들지 않지만, 지저분하고 악취가 심해 며칠 못할 거를 염려스러워하는 말이었다. 사담이 길어지는 걸 나로서는 상당히 싫어하는 편이라 중간에 말을 끊으려 무던 애를 써 보았다. 말할 기회도 주지 않는 듯했다. 서울말로 순화되어가려다 멈춰진, 경상도 억양이 섞여 들렸다. 경남보다 경북 쪽 같았다.

“내 나이가 예순 하나지만, 여기서 일한 지는 삼 년도 안 되었고, 넥타이 매고 일하는 사람보다 훨씬 낫다. 거의 관리자인 셈이지. 여기 일이 학교에서 쏟아지는 쓰레기를 따로 거둬 가 처리하는 일인데, 화장실에서 나온 똥 닦은 휴지도 많고 더러운 것이 많아. 그렇지만 전망은 있어. 여기 사장님이 수입이 한 달에 삼천만 원 정도 되거든. 여기 단국대학교 하고, 서울 고대에 사업을 벌여놓았고, 몇몇 젊은 친구들이 일을 배워서 다른 학교로 사업을 벌여 나갔거든. 자네도 일하다, 여러 가지 배우면 나가서 다른 대학교에 배정받아 할 수 있어.”

일은 고되지만, 결국 고급스럽게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별반 다를 게 없다. 학교가 지어지고 부가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의 도미노 경제적 효과를 부장은 설명하고 있었다. 이 일도 전망이 무척 밝다. 굳이 애써 설명하지 않아도 됩니다. 내일이라도 당장 일할 수 있습니다. 이빨을 치료해야 해서 병원에 다녀야 하니 편의만 봐달라. 전에 일하던 직장에서 일할 때 중간에 빼줄 수 없다, 해 그만둔 거다.

“그래. 그거야, 예비군 훈련도 받는데 뭐, 그게 대순 가. 상관없다.”

일하는 시간은 아침 일곱 시 반부터 여섯 시까지. 일이 좀 늦어지면 여섯 시 반까지 할 수 있다. 별반 상관없긴 하지만 월급이 백만 원이 적네요. 처음에 누구나 책정된 거야. 일하는 거 봐서 시간이 지나 몇 개월 지나면 백오십까지 맞춰 줄 수 있다. 바쁜 시기가 학교 축제야. 학교 축제가 일 년에 두 번이야. 봄 학기와 가을학기야. 어마어마하게 쓰레기가 쏟아져 감당을 못할 정도지. 그때도 그때지만 지금도 일손이 부족해. 그래서 광고를 낸 거고. 일거리가 많아진 것이 새 학기가 시작된 삼월이고, 오월 축제를 대비해 사람을 뽑는 중이란 거.

여기는 여름방학 때문에 휴가가 이주 씩 가. 왜냐하면 학생들이 7~8월이 방학이라 쓰레기 양이 현저하게 줄어든다, 그래서 직원들끼리 날짜를 정해 돌아가면서 간다.

4대 보험에 대해서도 물었다.

“4대 보험은 아직 안 되고 처음에 고용보험과 산재보험만 되고, 그것도 일을 삼 개월 이상 지나야 추진해야 할 거 같다. 아직은 4대 보험까지는 시행이 안 되고 있는데, 사장님께 말씀드려서 시행해야지.”

“제가 의료보험 때문에 어찌할지를 몰라서요. 치료하려면 계속 치과에 다녀야 하거든요.”

“응. 걱정하지 마, 일만 잘해주면 토요일도 쉴 수 있거든. 굳이 토요일까지 나와 일하는 거 별로야. 토요일에 학생들이 안 나오기 때문에 팀워크만 잘되면 얼마든지 쉴 수 있다. ”

언제부터 일할 수 있나. 바로 내일부터 출근하겠습니다.

인터뷰가 끝났다. 등본 한 통은 떼어오고, 재직서류는 출근해서 작성하라. 그가 말을 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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