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 날에 옛 일을 기억해내다보면 감상의 터럭에 젖을 때가 많아.
“정동 라디오 극장까지 간 것까지 말했잖아요.”
“아…. 예. 그렇군요. 그때는 난처하기도 했었고 불안했었죠. 남자는 우리뿐이었으니까요. 직접 연예인이 출연한 것도 봤어요. 너무나 즐거운 한때였어요. 그 이후로 ‘이문세의 별이 빛나는 밤에’를 무지 좋아하게 된 겁니다. 지금도 이문세의 -별이 빛나는 밤에 -시그널 음악이 잔잔히 흐르면 범준이랑 지냈던 일들이 생각이 나요. 엽서도 그가 그려서 보낸 것이 저한테로 다시 미국에서 온 것이지요. 내용에 경화 씨 이야기가 너무 간절하게 쓰여 있어서 찾아간다는 약속을 했고 급기야는 정말 찾아서 그한테 편지를 써 달라고 부탁을 드렸던 겁니다.”
“바로 어제 일같이 생생하게 기억하는군요. 그런데 언중 씨 말이 맞아떨어졌군요. 덕수궁 돌담길을 같이 걸으면 헤어진다는 것이 사실이 되었군요. 연인이든 친구이든. 지금은 연락을 안 하나 봐요. 편지는 끊겼나요?”
“저는 군대 가야 했거든요. 국제 편지는 군대에서 보낼 수 없잖아요. 뭐 그렇다고 아예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죠. 얼굴을 볼 수 없는 상태에서 편지로만 세월을 헤아린다는 거는 너무 힘들었고 우선은 그것보다는 입대 전에 학력고사는 엉망이 되어버렸죠.”
“왜요?”
“노력하지 않았으니까요.”
후, 한숨을 터트렸다. 그만 이야기해요. 무의미해요. 빗줄기는 시원스레 내리쳤지만 비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맥주를 들이켰다. 경화는 계속 이야기를 기다렸다. 하던 이야기 계속해요. 하다 말고 뭐예요. 비가 싫었다. 비가 내리면 모든 것이 멈추어지고 대기상태로 돌아가야만 한다. 군대에서도 그랬고 지금에 와서는 그나마 막일도 나가지 못한다. 그런 대기상태를 표현하는 거처럼 이야기를 끊은 것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요? 어떻게 됐는데요? 네?”
무척 궁금한 얼굴을 한 경화의 맑은 눈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서서히 기억의 한편에서 떠올랐다. 범준 편지를 들고 화실로 갔을 때 어떤 연유로 자신을 찾아왔는지 무척 의아해하던 그 하얀 얼굴과 그 맑은 눈 속에 내 얼굴이 들어 있었던 때를.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