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데생 -8

경화가 고등학생 때 다니던 화실 방문

by 이규만

그랬지만 로열 살루트를 늘어놓은 말에 적절한 응대 수준밖에 되지 않았고 계속 이어지는 그림으로 이야기가 주안점으로 돌아갔다. 말하다 보면 느닷없이 튀어나오는 자신의 화려한 경력도 이력도 조금은 자랑삼아 내세울 법한데 전혀 그러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나도 그녀 말에 시큰둥하게 답하는 말뿐이었다.

“글쎄요. 전 고등학생 때 데생이나, 수채화 같은 그림밖에 대하지 않아서 좀 광범위하네요. 사실은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별로 인상에 남는 것도 없고.”

“그래도 그중에서 마음에 드는 그림이 있었을 거 아니에요?”

“물방울 그림 다음에 본 그림 있잖아요. 그거. 수채화도 크게 그릴 수 있구나 하고, 전지에다 그린 고목 풍경화가 참 맘에 들던 데…, 역시 전 아직 사실주의가 좋아요.”

“그렇군요.”

“경화 씨는요?”

“저도 마찬가지예요. 뭐라고 구체적으로 딱 잘라 말하기에는 무리죠. 단지 몰입이란 거를 이해하게 되죠.”

“몰입?”

“네. 몰입이요. 어떤 작가들은 보면 한 가지 맘에 드는 것이 있으면 그림마다 이니셜같이 어떠한 부분에 가서는 꼭 자신의 독특한 기법이 들어가죠. 각자의 형식이 있어서 누구의 그림인지 금방 알게 되죠. 예를 들면 어떤 작가는 사람의 특이한 인상을 형상화해서 사물을 그리면 그 특이한 인상을 작품 속에 그림자가 겹치듯 꼭 넣고는 하죠. 어떤 분은 나무무늬 결만 수십 년씩 그리는 분이 있네요.”

차를 마시던 터라 말이 중간에 끊겼다가 이어졌다.

“맨 처음 언중 씨를 보았을 때 저도 금방 알아본 거는 아니에요. 버스정류장에서 그렇게 며칠을 두고 보게 되니까, 차츰차츰 어느 기억 속 한편에서 떠오르는 거예요. 차차 어느 기억의 향기가 스며들어 가듯이. 마치 재스민 향처럼요. 언중 씨를 알아보게 되자 바쁘게 사는 모습이 좋았고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가. 구체적으로 알고 싶었어요. 그래서 이렇게 만나게 된 거지만요. 전요. 언중 씨한테 범준 씨가 소중한 추억의 한편으로 간직되면 좋겠어요.”

감정선을 개입해 물어봤을 적의 때와는 달리 꽤 누그러진 그녀의 말이었다. 곤두세우고 피하려 들었던 그녀였었는데. 이제는 대놓고 범준을 말하고는 있었지만, 추억으로 덮으려 들고 있다. 여자의 속이 궁금했다. 궁극적 확연한 속내를 드러내 보여 준다면 이렇게 답답해하진 않을 텐데. 묻고 싶어졌다. 범준이는 그저 추억일 뿐인지. 하긴 그녀의 말이 틀리지는 않았다. 얼굴도 다시금 볼 수 없는 마당에 추억으로라도 있다면 다행이겠지.

“그래요.”

이내 무료해지고 말았다. 동공이 천천히 흐려졌다.

누군가 기억할 수 있는 편린. 찌꺼기. 찻집에서 ‘조 하문’ 노래가 흘러나왔다. 같은 하늘 아래 있었지. 그 아래 경화를 보니 얼마나 행복한가. 언중이 너는 모를 거다.

같은 하늘 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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