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고록 #9. 2003~2004년(22~23세)

by 나를찾는나

2년 반 정도 과외를 열심히 하면서

유럽 여행을 갈 경비를 모았다

벌써 3학년이 되어 조금 뒤늦은 여행이었지만

내 스스로 벌어 가야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홀로 돈을 모아 여행을 가는 딸이 대견하셨는지

부모님은 카드를 내어 주셨다

하지만 비상시에만 사용하는 카드라고 생각했기에

주어진 예산 안에서 해결해야했다고 생각했다


넉넉치 않은 예산으로 한달간의 유럽 배낭여행을 떠났다

고등학교 시절 친했던 삼총사 중 한 친구와 떠난 여행이었다

나는 오랜 기간 여행을 준비해 왔기에 루트 짜기, 숙소 예약 등

필요한 모든 것을 챙기며 여행을 주도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왕 가는 여행 좀 더 깨끗한 곳에서

맛있는 거 먹고 즐기며 보냈으면 좋았으련만

나는 힘들게 모은 돈을 헛되게 쓰지 않으려고 발버둥쳤다


제일 저렴한 민박이나 호스텔을 갔고

유명 명소 위주로 찍듯이 짧게 머물고

밥도 제일 싼 거 위주로 떼우는 여행의 나날이었다




그래도 그 와중에 예쁜 오스트리아의 하늘,

스위스의 아름다운 풍경,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은

너무도 즐겁고 짜릿했다


그리고 거기서 내 첫 남자친구를 만났다


첫 만남은 독일 어느 버스 정류장이었던 거 같다

나는 지금도 그렇지만 사람의 얼굴을 잘 보지 않는 습관이 있다

왜 인지 요새 문득 궁금해졌는데 사람의 얼굴을 보는 게 약간

예의바르지 않다고 배웠는지도 모르겠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얼굴을 마주하는 건 참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인데

왜 이런 습관이 생겼는지는 모르겠지만, 암튼 처음 만났을때도

그가 질문을 해왔는데 내 친구가 대답을 했기 때문에

굳이 나는 얼굴을 쳐다 보지 않았다


그리곤 어디에 묵냐고 물었고 마침 같은 호스텔에 가는 걸 알게 되어

같이 이동했고 숙소에 도착해서야 얼굴을 제대로 마주하고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직전 연애를 끝내고 군대가기전에 배낭여행을 왔다고 했다

아직 직전 연애에 대한 미련이 꽤 남아있구나 하는 느낌도 받았던 거같다


그 즈음에 또래 친구들을 꽤 많이 만났다

친해진 무리끼리 하루 이틀 여행을 같이 다니기도 하고

놀기도 하고 술도 마시며 꽤 친해졌다


여행은 새로움과 즐거움이 가득한 모험이었다

심지어 배경도 너무 아름다운 유럽이었으니

감수성과 즐거운 감정의 도파민이 팍팍 나오는 여행이었다


여행지에서 몇몇 남자들의 대쉬를 받기도 하고

고백이 담긴 엽서를 받기도 하고, 냉큼 손을 잡는 남자애도 있었고

하여튼 연애를 안해본(못해본?) 나에게는 그런 경험들이 별천지같았다


그 와중에도 그 친구와는 이성의 케미나 사건 같은게 없었다

그저 한달간의 여행 기간에 동선이 겹치며 여러번 마주쳤고

여러번 인사를 나누며 내적 친밀감이 생겼던 거 같다

이성의 감정이 생긴건 귀국 후 모임에서였다






여행에서 여러 친구들을 사귀었지만

그 여행을 통해 나는 절친 하나를 잃었다


아직도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다

사실 알았었는데 이제는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여행을 통해 이 친구는 나와 성향이 매우 맞지 않다는 걸 확인했고

그래서 나는 몇년을 함께 해온 친구가 낯설어져버렸다


삼총사 중에 둘이 틀어지면서

이 모임도 유지는 어려워졌고

나중에 어느 순간 아예 만나지 않게 되었다

(다른 한명과는 아직도 잘 지낸다)


연애와 결혼이 많이 다르듯

함께 삶의 시간을 나누는 일은 그만큼 난이도가 많이 높은 일인 거 같다

그 친구도 나도 어린 그 시절보다

지금은 좀 더 다름을 넓게 포용하는 어른으로 성장했겠지? 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부디 그랬으면 한다

그 친구가 잘 살고 있기를 문득 빌어본다





귀국을 하고 나서도 여행지 친구들은 새벽까지

온라인 채팅을 하며 밤을 새기 일쑤였다

통화도 길게 하고 여행지의 추억을 떠올리며

한동안 마음이 들쓱들쓱한 나날들이 이어졌다


여행 후 모임차 날을 잡고 남자 4, 여자 4이 모였다

하루 종일 실컷 놀고 찜질방에서 밤을 지내고 오는

심지어 외박까지 허락받은 모임이었다


일은 그때 생겼다

역시 남녀가 밤을 보내면 일이 생기는 법이다


찜질방에서 우연히 그 친구와 내가 같이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 나란히 누웠고

그 친구가 팔배게를 해주기도 하고

같이 잠이 들었다가 다시 깨서 이야기를 나누며 밤을 보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누워있는 나를 그 친구가 뒤에서 살짝 안았다

나는 너무 놀래서 움직일 수가 없어 가만히 있었다


일은 그게 전부였지만

3학년까지 모태솔로였던 나에게는 엄청난, 그야말로 일이였다


아침이 되어 모임이 파하고

마음이 싱숭생숭해졌다

이 친구는 곧 군대에 가는데 이게 뭔가 싶기도 했다

그 친구도 날이 밝자 아차 싶었는지

이메일로 본인의 경솔함을 사과했다


그리고 머지 않아 군대에 가버렸다





나도 현실로 돌아와 교환학생을 준비했다

여행도 늦었지만 교환학생도 늦은 편이었다

부모님이 어학연수는 그냥 돈쓰며 노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셨기에

나는 해외 연수 대신 교환학생을 가야했다


부랴부랴 준비해서 겨우겨우 합격통보를 받아

3학년이 끝나고 4학년때 교환학생을 갔다

교환학생을 다녀오면 보통 1년을 더 다녀야해서

휴학은 하지 않았지만 학교를 5년을 다니게 되었다


암튼 교환학생을 가기전까지도

그 친구는 계속 편지를 보내왔고

첫 휴가, 그 다음 휴가도 우리는 계속 만났다

만나면 애인도 친구도 아닌 애매한 감정의 사이에서

헷갈리는 만남이 계속 이어졌다


내가 외국에 나가서도 그 친구의 편지는 계속 날아왔다

어찌나 성실히 편지를 쓰던지.

물론 군대라는 환경이 사람을 그렇게 만든다는 건 충분히 예상이 된다

나도 마음이 있었기에 답장은 꼬박꼬박 해주었다


교환학생 생활도 내게 잊지 못한 추억과 사람을 안겨주었다

같이 외국인 기숙사에서 지내던 친구들과 동생들을 얻었고

인생의 친구 하나도 거기서 만났다


수업도 열심히 여행도 열심히 다녔고

어학 점수를 받기 위해 노력했다


나는 그때도 참 성실했다

모범적으로 생활하며 공부하는

바른 생활 소녀 생활을 했다


그럼에도 혼자 살아보는 경험은 처음이었고

그것도 낯선 외국이었기에 내겐 도전과 같은 경험이기도 했다


현지 친구들도 많이 사귀고

서로의 언어를 가르쳐주고

여행도 같이 다니며 언어 실력을 날이 갈수록 늘었다


중간중간 해외 출장차

아빠가 오셨는데 아빠와 둘이 식사도 하고

넓직한 호텔에서 자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도 하고 참 좋았다

그때 아빠와의 추억을 떠올리면 참 좋다


1년의 교환학생 생활을 마무리하면서

40일간 배낭 여행을 했다

이번에는 부모님이 지원을 해주셨다

어학연수 대신 교환학생을 가서

성실히 공부하고 좋은 점수를 따온 딸에 대한 특상이었겠지

대학시절 가장 친했던, 다른 지역에서 연수를 하던 친구와 만나 40일을 돌았다


유럽 여행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여행지는 유럽과 같은 아름다운 낭만보다는

어드벤처같은 곳이었고 그만큼 사건사고도 많았다


그런 상황에서도 내 친구는 나에게 많이 맞춰줬던 거 같다

그때도 지금도 그 친구는 내게 그런 존재다

덕분에 우리는 아주 잘 여행을 마쳤다

그 친구는 여전히 나의 베프로 내 곁에 남아있다

새삼 매번 나의 부족한 면을 포용해주는 그 친구에게 고마워진다




교환학생을 마치고 돌아온 겨울

군대에 갔었던 그도 제대가 몇개월 남지 않은 병장이 되었다

말년이라고 휴가도 자주 나왔다


휴가 기간에 계속 만나면

그 친구는 나를 거진 여자친구처럼 대하는 날이 많았다

하지만 나는 이 애매한 만남에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어느 겨울, 나는 물었다

"우리가 무슨 사이야?"

그리곤 더 이상 이렇게 애매하게 만나는 건

안하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그는 잠시 망설이더니 말했다

"사귀자"


그게 내 첫 연애의 시작이었다

남들은 다 쉽게 하는 거처럼 보이는 데

내겐 참 쉽지 않았던 첫 연애가

그렇게 그와 만난지 1년 반이 지나서야

옆구리 쿡 찔러 절받듯 시작되었다


어쨋든 내게도 연애의 포문이 열린 기념비적인 날이었다

사귀자마자 스티커 사진을 찍는 바람에

아주 오랫동안 그와의 사진 속에 풋풋하고 설레이는

내 모습을 오래 기억할 수 있었다

참 예쁜 기억이다, 새삼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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