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고록 #11. 2007~2008년(26~27세)

by 나를찾는나

입사 후 1년이 지나 회사 생활에는 어느정도 적응이 되었고

남자친구는 어학연수를 떠났다


돌이켜보면 만난 기간은 꽤 긴데

상당히 긴 시간 떨어져있었던 거 같기도 하다


롱디가 익숙한 커플이긴 했어도

그때는 직장인과 학생이라는 다른 역할을 가지고 있었기에

정서상으로 아주 안정적이지많은 않았던 거 같다

입사 후 나 역시 썸 비슷한 것을 겪었고

새로운 환경과 사람들과의 만남이 주는

시간과 공기의 낯설지만 긍정적인 흔들림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나는 되려 더 불안했다


예상대로 우리는 서로가 옆에 없는 동안

상당한 빈도로 엇갈림을 겪어야 했다

나는 무리한 요구들을 하기도 했고

쉽게 상황을 오해 하고 화를 내기도 했다


롱디가 힘든 이유는

그 사람의 부재가 내 감정의 농도를 희석하는 데서 오는게 아니었다

그저 내 자신의 마음의 불안에서 오는 거였다


그럼에도 우리는 1년을 버텨냈다

여름 휴가 때 일주일 정도 그가 있는 곳으로 가서 함께 시간을 보내고

내 불안함이 더 커지지 않게 하려고 애를 썼던 그의 끈기있는 노력 덕분에

어찌어찌 시간이 흘러 그도 돌아왔다






지금 생각해도 그는 참 빈틈이 많은 사람이었다

군대에 있을때 미니 홈피를 관리해달라며 비번을 알려 주기도 하고

무심코 하는 말들을 내뱉을때 내 상식으로는 당연히 알아야 하는 것들을 모르기도 했다

친구들도 내겐 낯선 부류가 많았다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내가 너무 좋아했고 오랜 시간을 만났기에

그저 나는 행복의 시간에 빠져있었다

그는 내게 완벽한 존재였다


그가 졸업반을 앞두고 취업 준비에 들어가면서

데이트 시간을 많이 내지 못할 꺼라고 했을때도

서운했지만 받아들였다


우리 연애는 기울어진 운동장이었다

나는 첫 연애, 그는 N번째 연애였기 때문일까

아니면 내 감정의 밀도가 그보다 훨씬 높았기 때문일까

나는 내가 더 좋아하는 연애가 좋으면서 버거웠다




어느 연휴 집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문득 그의 메일함을 열어보고 싶어졌다

연애 4년이 되도록 한번도 보지 않았던 건데

왜 였는지는 정말 모르겠다

이런게 여자의 직감, 촉이라면 그런 거겠지


그가 아버지에게 보낸 메일을 읽다 알게 됐다

그가 나에게 수년간 한 거짓말의 실체를.

그는 내가 알고 있는 대학교 학생이 아니었다

그걸 내게 속이고 있어서 괴롭다는 내용도 있었다


내 친구들이 많이 다니는 학교였고

내 아버지가 졸업하신 학교였으며

심지어 그가 내 동생에게 투어를 시켜줬던 학교였다


무려 5년이었다

우리가 배낭여행에서 처음 만나게 된 순간부터

지금까지 자그만치 5년의 시간을

나와 내 가족을 속였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이었다


너무 좋아하는 마음으로 수년의 시간을 나눴던 사이었고,

서로의 가족, 친구들에게도 서로에 대한 마음의 크기와 헌신을 약속했던 사이었기에

나는 온전히 무너졌다

그야말로 나는 제 정신이 아니었다

일상을 살아갈 수 없게 나는 멈춰섰다




앞뒤 가리지 않고 일단 그를 찾았다

보자마자 주체할수 없이 무너지면서

"내게 속인 거 없어?" 라고 묻는 나를 보며

그는 바로 알아차렸다


그 다음이 가관이었다

그는 바로 헤어짐을 고했다

어떤 사죄나 진심어린 고해성사를 바란 건 아니었지만

나는 너무 당황했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것을 알았다는 듯

아주 빠르고 깔끔한 이별 통보였다


이별을 수년간 준비한 자와

마른 하늘의 날벼락을 당한 사람의 입장이 어디 같겠는가

게다가 더 좋아하는 쪽은 늘 나였다


무너짐과 혼란, 당황스러움이 섞인 나에게

그는 너는 나를 감당하지 못할꺼라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말은 맞는 말이었다


준비하지 않은 상태로 헤어지고 나서

나는 가족과 친구들을 붙잡고 오열했다

대부분이 헤어지는 게 맞다고 잘된거라고 했다

그게 나는 더 힘들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힘을 다 잃은 상태였고

마음의 고통과 괴로움이 너무 커서 나를 잠식하는 느낌이었다

몇날 몇일 피폐해진 몸과 마음으로 그냥 숨만 쉬고 있던 나날들이 이어졌다






방안에서 멍하니 창문만 바라보던 봄볕이 참 좋던 주말이었다

아빠가 조용히 방에 들어오셨다

본인의 첫 사랑 이야기를 하셨다

그때 놓쳐서 마음에 남아있던 어떤 분에 대한 이야기었다

그리고 말미에 조용히 덪붙이셨다

"아빠는 너가 좋다면 괜찮다"


그말이 그때 내겐 엄청난 희망이 됐다

아빠도 처음부터 아빠가 아니었구나

사랑을 하던 어린 남자였구나- 하는 생각도 했다

지금도 내가 아는 가장 이성적인 분인 우리 아빠가

그저 내 딸의 괴로움을 목도하고 괜찮다고 하셨던 그 순간이

아직도 나는 잊혀지지가 않는다

아빠는 그만큼 나를 사랑하시기에 내가 아프지 않기를 바라시기에

그런 말씀을 하신게 아니었을까

나도 부모가 되보니 그게 쉽지 않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된다


마음의 고통을 사라지게 해줄 면죄부를 얻고

나는 그에게 연락을 했다

나는 괜찮으니 우리 다시 만나자고

나는 또 한번 기울어진 운동장에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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