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고록 #5. 1994년~1995년(13~14세)

by 나를찾는나


중학교는 남녀공학이었으나 남녀분반 학급이었다

묘하게 이성에 대한 호기심이 많아지는 시기의 아이들을

애매하게 떨어트리면서 서로가 더욱 궁금해지도록 만드는 이상한 운영체계였다



내가 좋아했던 6학년 반장은 우리 옆반이 되었다

딱 좋았다

복도에서 오고 갈때,등하교길에

언제든 자주 마주칠 수 있는 거리였다



중학생이 되자 친구들의 행보도 묘하게 갈라졌다

선생님들이 애정하는 학구파 친구들은 항상 있었고

슬쩍슬쩍 연애에 호기심을 가지는 친구들이 있었고

고학년 킹카와 연애를 한다고 소문이 나는 예쁘장한 애들 외

본드를 한다느니 커터칼을 씹는다느니 무시무시한 소문이 나는 애들도 있었다



나는 일단 주어진 조건이 뚱뚱하고 못생겼기에

연애나 커터칼 쪽 근처에는 가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공부를 또 아주 잘 하지도 않았기에 학구파쪽에도 끼지 못했다

한마디로 그냥 어정쩡한 포지션이었다



그럼에도 운이 좋았는지 못생기고 어정쩡하지만

엇비슷하게 어정쩡한, 그럭저럭 착한 친구들 무리에 들어갔다

공부는 잘 못하고 관심도 없지만

남자애들과 어울려 보는 것에는

관심이 매우 많은 친구들이었다


병아리 청춘이었다







그 당시 무리에 들어가면

일단 호구조사부터 했다

그 당시 호구조사는 아빠 직급이나 아파트에 사는지 여부가 아닌

연애를 해봤는지, 좋아하는 애는 있는지, 몇반 누구인지가 주된 관심사였다


못생긴 내가 초등 시절부터 쭉 좋아해온 반장이

바로 옆반에 있다는 걸 알고 애들은 환호했다

가장 적극적이었던 여자애는

아예 그 반의 어정쩡한 남자애 몇명을 불러

하교 후 따로 데이트를 추진했다


내가 좋아한 반장은 선생님의 애정을 듬뿍 받는 범생이었기에

물론 그런 자리에 나올리가 만무했다


그 남자애가 나오지도 않는 자리였지만

어떤 이유인지 나도 나가야 한다고했다

자리를 만든 친구는 나를 데리고 나가기엔

내 꼴이 영 안되겠던지 옷 한벌을 사왔다


그때는 힙합이 유행했던 시절이라

잘나가는 애들은 통이 아주 넓은 바지나 짧은 배꼽티를 입었는데

내가 그런 옷을 가지고 있을리 만무했다


못생긴 나를 데리고 나가기가 챙피했던 건지

나를 위하는 마음이었던건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그 친구는 자기 용돈으로 베이지색 멜빵바지를 사다줬다


그걸 입고 그 자리에 들러리처럼 나갔던 기억은 어렴풋하게 난다

멜빵 바지를 사줬던 친구는 그 자리에서 한 남자애랑 잘되서

결국 사귀게 됐다. 아마도 그게 주요 목적이었던 거 같긴 하다


그 둘이 사귀면서 다행히 더 이상 그런 자리는 없었다

나중에는 둘이 진도를 어디까지 나갔다느니 하는 소문만 무성했다

덕분에 나도 유행하는 옷이 하나 생겨서 좋았다









내가 옆반 범생이를 좋아한다는 사실은 빠르게 퍼져

반 친구들이 거의 모두 알 지경이 되었다


발렌타인 데이였는지 화이트 데이였는지

아무튼 무슨 날만 되면

친구들은 선물을 전달해주겠다며

카드와 선물을 준비해오라고 했다


나는 좋아하는 마음은 있었지만

그걸 표현하거나 전할 생각은 한번도 해본적이 없었기에

친구들의 요구는 굉장한 문화적 충격이었다


하지만 그 시절에는 누구에게나 또래 집단의 요구가

아주 크고 중요해지기는 시기이고

나는 아주 순진한 아이였기에 착실하게 따랐다


뭘 샀었는지는 가물가물 한데

머그컵 같은 걸 사왔던 적도 있는거 같고..

선물보다는 카드가 기억에 남는데

친구들이 카드에 내 시그니처를 남겨야한다길래

항상 웃는 스마일을 남겼다

이름은 끝까지 남기지 않았다


그걸 옆반 체육시간에 교실이 비면

친구들이 책상 위에 두고 왔다

또는 직접 그 애에게 전달해 주고 오는 친구도 있었다


이름을 끝까지 쓰지 않았는데도

친구들이 너무 많이 티를 내는 바람에

결국 옆반 애들 대부분이 그 스마일이 나인 걸 알았챘다

그 애도 모를 수가 없었다






생각해보면 좋아했던 마음도 분명 있었겠지만

주변에서 표현하고 전달하는 그 과정 자체가

더 재미있었던 거 같다


하두 여럿이서 부채질을 해대니

내가 그 애를 얼마나 좋아하는 지 보다는

옆 반 남자애 짝사랑하기 놀이에 단체로 열광해서

그게 신났던거지


애들이 그 애 사진을 찍어오면

나는 그걸 사람 모양으로 잘라서 작은 통에 넣어 다녔다

이불도 덮어줬다

애들은 내가 그애를 좋아해서 미쳤다고 배꼽을 잡고 웃었다

나는 그것도 재미있었다


고백을 해서 차이고 말고는 애당초 안중에도 없었다

이 애는 내가 좋아하는 애. 라고 공식적으로 모두가 알고 있었고

친구들이 때마나 선물도 전해주고 좋아하는 티를 팍팍 내주니

사귀지도 않는 데 공식적으로 뭔가 승인받은거 같다는 생각도 들었던 거 같다






6학년때 같은 반이었던 한 친구도 반장을 오랫동안 좋아해왔고

그 애 생일에 편지를 줬다는 소리를 듣고 모두가 충격에 휩싸였다

나도 기분이 너무 나빠 그 애를 한창 미워했다

친구들도 어쩌면 그럴 수가 있냐며 같이 욕을 해댔다

다른 사람의 마음에 내가 화를 낼 자격이 일도 없는데도

그때의 어린 나는 어처구니 없는 배신감에 휩싸였다


반장은 그 편지를 받고 바로 찢어버렸다고 한다

그 얘기를 듣고 나는 너무 기뻤다


내 선물과 편지는 항상 조용히 받아줬는데

그 애 편지를 찢었다는 이야기를 듣고나서부터는

그에도 어쩌면 나를 좋아하는 마음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어쩌면 나를 좋아하진 않지만

학교에서 본인의 의지와는 별개로 공식적(?)이 된 짝사랑녀를

배신 하는 순간 주변의 뭇매를 맞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사회적 압박을 느꼈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어 살짝 미안해지기도 한다





그래도 하루는 아직도 꽤 또렷이 기억이 난다

그 날은 내가 뭔가 잘못을 했던지 하교 후 청소 당번에 걸렸다

반장 하교길을 뒤에서 따라가는 것이

당시 중요한 일과 중 하나 였는데 그걸 못하게 되어 너무 속상했다



청소를 마치고 친구와 투덜투덜하며 하교를 하는데

정문에 반장이 서있는게 아닌가

나를 기다린 눈치였다

나를 보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집으로 향했는데

그날은 정말 기분이 날아갈 꺼 같았다



나를 기다려준 건지는 아직도 모르고 앞으로도 알수 없겠지만

그날은 내 마음에 그가 화답해 준 거 같았다

마음 한켠에 이미 답을 받았다는 생각이 충만했다


돌이켜보면 나는 참 순수했다

사귄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하는 차원의 일이었고

그건 날라리들이나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 애의 답은 그 날 다 받았다고. 나는 생각했던 거 같다





아마도 나는 2학년 어느 시점까지도 그 애를 좋아했던 거 같다

단 한번 화답을 받았다지만 일방으로 가던 마음의 힘은 점점 약해졌고

1학년 때 으쌰으쌰 마음을 전달해주던 친구들도 뿔뿔이 흩어지면서

요란했던 내 사랑도 정확한 시점과 이유를 알수 없이 옅어졌다


2년간의 요란한 짝사랑 놀이는

이불을 살짝 걷어차고 싶은 부끄럼은 있지만

웃음이 더 많이 나는 기억, 추억이 되었다


2학년 후반이 되자

학군지의 성격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특목고를 갈 수 있는 아이와 그렇지 않은 아이

공부를 잘 하는 아이와 그렇지 않은 아이로

계급이 서서히 나뉘는 느낌을 나는 받기 시작했다


그때의 나는 여전히,

외모도 공부도 어정쩡한 아이였다





















작가의 이전글회고록 #4. 1992년~1994년(11세~13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