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인연과 함께 나아가다.
부제: 뜻밖의 쉼터
나는 대체로 주어진 현실을 수용하고 나름의 방식으로 즐기며 살아가는 편이다. 하지만 암 환자로서의 삶은 예측도 상상도 쉽지 않았다. 그런 내게 요양병원에서의 새로운 만남은 뜻밖의 선물이었다. 처음엔 낯설게만 느껴졌던 공간이 그녀들과 함께 지내면서 점점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는 작은 쉼터가 되었다. 요양병원은 치유와 회복 그리고 힘차게 나아갈 용기를 준비할 수 있었던 소중한 곳이었다.
본병원으로 매일 방사선 치료를 다니기 위해 암 요양병원에 입원했다. 다양한 면역 보완 요법 중에서 면역 주사를 맞고 도수 치료와 림프 마사지를 받았다. 지금 내게 가장 중요한 건 항암과 방사선 치료였다. 그 효과에 방해가 되지 않을 것이라 판단한 세 가지 치료만 선택했다. 무언가를 하지 않는 것 역시 내게는 중요한 치료의 일부였다.
3인실. 처음 들어선 병실은 낯설고 고요했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과 한 공간에서 살아야 한다는 부담은 잠깐뿐이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적당한 거리를 두되 필요한 만큼 다정한 관계를 만들어갔다. 말의 속도와 감정의 결이 닮아 대화는 편했고, 조용할 때는 조용히, 말이 필요할 때는 따뜻하게 곁을 내어주는 사이가 되었다. 컨디션이 좋았던 어떤 날에는 폭풍 수다를 떨기도 했다.
아침 식사를 마치면 늘 하던 대로 병원 근처 공원으로 산책을 나갔다. 앙상하던 가지 끝에는 연초록 잎눈이 맺히기 시작했고, 이름 모를 들풀들이 풀숲 아래에서 살며시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출근길로 분주한 서울 도심을 바라보며 낯선 도시 한복판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내 삶을 실감하곤 했다. 그래도 그 시간은 하루 중 가장 컨디션이 좋은 때였기에 시부모님께 매일 안부 전화를 드렸다.
지하 1층에 있는 식당은 뷔페식이었다. 백 명이 넘는 암 환자들이 정해진 시간에 맞춰 식사를 했다. 엘리베이터에 붙은 일주일 식단표는 매일의 관심사이자 소소한 기대였다. 오늘은 뭐가 나올까, 내가 좋아하는 반찬이 있을까. 비슷비슷한 메뉴와 익숙한 맛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상하게 늘 기대하게 되었다. 먹는 순간만큼은 긴장을 풀고 잠시 쉬어갈 수 있어서였던 걸까.
하지만 항암과 방사선 치료의 부작용이 서서히 나타나면서 식사도 예전 같지 않았다. 입맛이 없어 이것저것 집어보다가 젓가락을 놓는 날이 많아졌고, 항문이 민감해져 자극적인 음식은 피해야 했다. 먹을 수 있을 것 같아 식판을 가득 담아왔지만 막상 앉으면 몇 숟가락 뜨고는 그대로 남기는 날도 있었다. ‘먹는 게 남는 거’라던 말이 미안할 만큼 먹는 게 숙제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케이크 한 입만이라도."
“떡볶이에 김말이"
“라면 한 젓가락만"
“삼겹살에 시원한 맥주 한 모금이면 완벽한데"
우리는 떠올리기만 해도 군침이 돌지만 지금은 절대 가까이할 수 없는 것들을 말하며 기분을 전환시켰다. 아, 그리운 맛이여! 먹을 수 없다는 사실은 분명 아쉬웠지만 그 아쉬움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
힘든 치료가 계속될수록 병실은 어느새 작은 쉼터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몸은 힘들었지만 마음은 조금씩 편안해졌고, 함께 있는 시간이 쌓이면서 우리는 서로에게 익숙한 위로가 되어주었다. 치료 일정이나 부작용, 밥은 잘 먹었는지, 컨디션은 어떤지 등 사소한 안부를 챙기며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특히 우리 셋은 모두 암에 대해 열심히 공부하고 음식 관리에도 철저한 편이었다.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주고받고, 서로의 노력에 대해 깊이 공감하며 지냈다.
입맛이 없고 마음도 지쳐 있던 어느 봄날 우리는 외식을 하기로 했다. 병원 근처 낙지볶음 맛집에서 매콤한 맛으로 입맛을 되살렸다.
그리고 또 한 번 조금 특별한 외출을 감행했다. 택시를 타고 10분 거리의 비건 빵집에 다녀온 것이다. 치료 외에는 병원 밖으로 나가는 것도, 택시를 타는 것도 낯설게 느껴졌지만, 그날만큼은 마치 소풍이라도 가는 것처럼 마음이 설레었다. 룰루루~
우리는 허브차와 비건 빵 세 개를 주문했다. 우유, 설탕, 달걀, 버터도 들어가지 않은 쌀빵이었지만 그 담백함이 오히려 더 깊은 맛을 느끼게 했다. 작고 소박한 테이블에 마주 앉아 빵을 한 입씩 베어 물며 감탄을 터뜨렸다.
“세상에, 이게 뭐라고 이렇게 맛있지?”
세 가지 다른 맛의 빵은 우리 셋의 입과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치료로 메말라 가던 미각이 깨어나는 느낌에 마음까지 촉촉해지는 순간이었다.
어느 날, 친구가 기분 전환하라며 스마일 그림이 그려진 양말 세 켤레를 보내줬다. 우리는 하나씩 나눠 신고 인증샷을 찍어 보냈다. 그저 작은 선물이었지만 그날 하루가 조금 더 따뜻하고 밝아졌다.
그러고 보니 양말처럼 우리도 어느새 서로를 따뜻하게 감싸주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꼭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가만히 건네는 눈빛과 공감 속에 담긴 응원은 마음 깊숙이 스며들어 오래도록 위로가 되었다.
가장 마음이 아팠던 순간은 같은 병실에 있던 동생이 항암 치료를 마치고 돌아온 날이었다. 힘겨운 표정으로 말없이 자리에 누워 숨을 고를 때면 그 고통이 고스란히 전해져 와 마음이 저려왔다. 비슷한 처지라고 해도 아픈 사람을 위로하는 일은 언제나 어렵고 조심스러웠다. 어떤 말을 건네야 할지,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몰라 망설이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날도 있었다.
그저 옆에 가만히 있는 것밖에 할 수 없었지만 그것만으로도 동생에게 작은 위로가 되기를 조심스레 바랐다. 눈빛으로, 숨소리로, 말없이 곁을 지키는 시간. 그렇게 따로 또 같이, 각자의 속도로 병원 생활에 적응해 갔다. 서울에 올라와 덩그러니 혼자였지만 따뜻한 친구 두 명이 곁에 있어 외롭지 않았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었지만, 그 속에서 나만의 루틴을 찾으며 나름의 평온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나의 첫 번째 요양병원 생활은 따뜻하게 지나갔다. 그리고 나는 다시 새로운 장소에서 또 다른 시간들을 맞이하게 되었다.
*암 요양병원 생활을 슬기롭게 하기 위한 자세
-입원 목적을 생각하면서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임을 잊지 않는다.
-치료 일정 외에 시간을 효율적으로 보내기 위한 루틴을 만든다.
-치료 과정 중에 나타나는 부작용 등 내 몸의 변화를 잘 살피면서 필요한 프로그램을 이용한다.
-낯선 공간과 사람들 속에서 지내려면 열린 마음과 유연한 태도가 필요하다.
암 요양병원 일주일 기본 패키지는 평균 140-160만 원 정도. 한 달이면 600만 원이 훌쩍 넘는다. 하지만 실손보험이 있다면 부담은 훨씬 줄어든다. 처음 입원했던 병원은 면역 주사 1종류와 도수&림프 마사지를 기본으로 제공했고, 두 번째 병원에서는 면역 주사 2종류에 경구용 면역 증강제 3종류가 기본 프로그램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 외에도 다양한 치료들이 있어 필요에 따라 선택할 수 있다.
다인실(2-4인실)의 경우 함께 지내는 사람들이 있어 외롭지 않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단점도 있다. 혼자만의 시간이 부족하고, 기상과 수면 시간, TV 시청 등 생활 리듬의 차이에서 오는 불편함이 있다. 몸과 마음이 예민한 상태에서는 코 고는 소리나 대화 소리, 휴대폰 벨소리 등 작은 소리도 스트레스로 다가온다. (처음 입원했던 병원에서 그녀들을 만난 건 최고의 행운이었다. 두 번째 병원에서도 3인실에 있었는데 별다른 문제없이 잘 지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