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야, 프리지아!

봄이 배달되었습니다.

by ligdow


어제 오전에 문자 한 통이 도착했다.

“생화 배달 예정입니다.”

외출하고 돌아와 보니 현관 앞에는 큼지막한 종이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보낸 사람란에는 꽃업체의 상호명과 주소가 쓰여있었고, 꽃을 보냈다고 미리 귀띔해 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내 주소를 아는 지인들을 하나둘 추려보았지만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생일은 아직 2주나 남았고 그날을 기억할 법한 몇몇 친구들이 미리 보냈을 리도 만무했다. 이 상자 안에는 어떤 마음이 숨겨져 있을까...

설렘과 의구심이 뒤섞인 채 마치 비밀의 문을 열듯 조심스럽게 박스를 개봉했다.


박스를 열자 눈앞이 온통 선명한 노란빛으로 물들었고 “나야, 프리지아!" 하는 반가운 외침이 들리는 듯했다. 오밀조밀한 꽃봉오리 사이로 비집고 나온 은은한 향기가 코끝을 간질였다.

마치 나를 만나기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그 싱그러움이 순식간에 거실의 공기를 봄으로 바꿔놓았다.


카드 한 장 없는 이 익명의 선물은 기분 좋은 미스터리였다. 꽃집에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연결되지 않았고 밤새 향기로운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해답은 오늘 아침에 도착했다.

친구가 인터넷에서 프리지아 공고를 보고 내 생각이 나서 깜짝 선물을 보냈노라 고백해 온 것이다. 어제 공연을 보고 늦게 귀가하느라 연락을 못 했다는 친구의 말에 나는 오히려 웃음이 났다.


덕분에 나는 꽃의 정체를 상상하며 그 어느 때보다 향기로운 밤을 보냈다. 친구는 내가 프리지아를 좋아했던 게 기억나서 보냈다고 했지만 나는 안다.

며칠 전 카톡 대문에 걸어둔 내 글을 읽고 조용한 박수를 건네고 싶었으리라는 것을.


24년 2월 7일 생전 처음 대장내시경을 했다.
직장암 진단을 받았고 삼성서울병원에 진료 예약을 했다. 그리고 저녁부터 암 공부를 시작했다.

신기하게도 눈물은 나지 않았고 세상을 원망하지도 않았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면, 나라고 비켜갈 이유도 없었다. 시간은 어김없이 흘러가고 세상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내가 암 환자가 된 일은 그저 내 삶 안에서 일어난 내 일일 뿐이었다.

오늘은 26년 2월 7일. 한때는 손에 닿지 않을 것 같던 그날을 나는 평소와 다름없이 보냈다. 암과 함께 5년 중 재발률이 가장 높다는 2년을 조용히 흘려보냈다.

(중략)

앞으로도 그러리라 믿는다. 또한 보이지 않아도 행운은 늘 내 가까이에 머물고 있음을 알고 있다.


삶의 한 문턱이었던 그 시간을 품고 나아가는 나의 길 위에 친구가 마음을 얹어 주었다. 나를 향한 스스로의 격려와 다짐들이 외롭지 않게 누군가 그 시간을 함께 기억하며 지켜봐 주고 있다는 사실이 그저 감사하다.





식탁 위 프리지아들이 이제 막 기지개를 켜며 피어날 채비를 한다. 단단하게 입을 다물고 있던 꽃봉오리들이 그새 살짝 부풀어 올랐다. 그 싱그러운 변화가 마치 내가 다짐했던 희망의 문장들에 따뜻한 숨을 불어넣어 주는 것 같다.


다정한 응원을 보내준 친구에게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