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남들 하는 건 나도 다 하고 싶은데

by 오 지영

대학에 들어가며 나의 포부는 단 하나였다. 남들 하는 건 나도 다 하자! 조금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그때에 내가 바라는 것은 그거 하나였다. 고등학생 때 제대로 축제 한번 (당시 내가 다닌 고등학교는 2년에 1번 축제를 했는데 하필이면 내가 입원했던 기간이었다.) 즐기지 못했기에 할 수 있는 건 모두 다 할 생각이었다. 동기들과 때때로 MT도 다녀왔고, 축제 때 진리관 옥상에서 연예인도 구경하고, 주점에서 소시지 볶음도 팔고, 첫차를 타고 집에 돌아오기도 했다. 공강 시간이 길어질 때면 대학로 맛집에서 점심을 먹었고, 학생회에서 하나도 중대하지도 않은 일을 중대하게 논의하고는 술도 마셨다. 딱 하나. 해외 봉사 말고는 다 했다.


내 병은 왜인지 모르겠지만 몸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염증을 만들고 통증을 야기했다. 처음 발병 시기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포켓몬처럼 마치 진화라도 한 듯 그랬다. 유난히 무릎과 어깨 통증이 심했는데 신기하게도 이유는 없었다. 많이 걸어도, 많이 걷지 않아도 그냥 어느 순간부터 아파왔다. 학교를 올라가는 아침에는 분명 괜찮았는데 수업 다 듣고 내려올 때는 친구들의 부축을 받으며 내려왔고, 절뚝절뚝 걸어 집에 오는 날이 잦아졌다. 무릎에 물이 찬 듯 퉁퉁 붓고 열감이 올라왔다. 어깨가 아플 때는 혼자 샤워기를 들 수도 없었다. 반쯤 젖은 채로 욕조안에서 엉엉 울곤 했다.


병원에서 PET-CT를 찍었다. 혹시 다른 병이 생긴 건 아닌가 하여 류마티스 검사도 했다. 하지만 PET-CT 결과도 크게 나쁘지 않았고, 류마티스도 아니었다. 그저 통증이 심할 때 검사를 하면 수치는 높아져있었고, 딱히 다른 해결 방법이 없었다. 강한 진통소염제를 먹고 잠에 드는 것. 나도 주치의 선생님도 할 수 있는 것은 그뿐이었다.


심하지 않을 때는 절뚝거리며 집에 어떻게든 돌아왔는데 심할 때는 발을 디딜 수 조차 없었다. 버스정류장에서부터 집까지 거의 한쪽 발을 질질 끌고 왔다. 그것도 어려운 날이면 정류장 의자에 앉아서 남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누나 좀 데리러 와줘.” 그러면 동생은 군말 없이 나타나 나를 업고 집에 왔다. 동생 등에 업혀서 고마워 하고 말했다. 고맙고 또 미안했다. 하지만 동생은 가족이니까 괜찮았다. 미안하다 보다 고맙다를 더 많이 말할 수 있는 사이니까. 가족은 그런 거니까.


하지만 친구는 달랐다. 어쨌든 친구는 가족은 아니니까. 친구 중 아무도 내게 눈치를 주지도, 민폐라 생각할 계기를 만들지도 않았지만 아픈 날이 잦아질수록 나 스스로 작아지는 날이 많아졌다. 여행을 가자는 친구 말에 좋기보다 덜컥 겁이 날 때가 더 많았다. 가서 아프지 않을 수 있을까. 나 때문에 여행 계획이 틀어지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면 모두 여행을 가지 않거나, 내게 미안해하며 여행을 가거나, 아니면 억지로 나를 끌고 가거나 셋 중 하나일 게 분명했다.


그때부터였다. 언제든 웃으며 “괜찮다.”라고 얘기하게 된 것은.

(아프지만) 괜찮아. (나도 물론 가고 싶지만) 괜찮아. (내 다리가 또 말썽이지만) 괜찮아. 괜찮아. 정말 괜찮아. 친구들에게 내 아쉬움을 들키지 않으려고, 분위기를 어둡게 만들지 않으려 늘 괜찮다 이야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 다리 아프면 내가 업고라도 다닐게. 걱정 마.” 하는 무리가 있어 세상의 반짝이는 것들을 눈에 더 담을 수 있었다. 고맙게 생각한다.


그런 생활이 반복되고, 그 반복으로 지쳐 갈 때쯤 “오늘 무릎 아프겠는데” 생각이 드는 날이 있었다. 그러면 10번에 8번은 맞았다. 아프기 전의 느낌을 알게 된 것이다. 이름도 모르는 병의 통증을 내가 예측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 날은 아프지 않아도 미리 약봉지 하나를 입에 털어 넣고, 또 하나를 가방에 챙겼다. 이걸 관리라 하던가. 그래서 나는 이 이름 모를 아이와 친구가 될 수 있을 줄 알았다. 병명을 알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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