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위의 친구들이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지고, 아이와 함께 일상을 꾸려가는 것을 많이 봐왔다. 그리고 내게도 사랑스러운 조카가 둘이나 있으니,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리 멀리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가늠할 수 없는 사랑이 있기는 하다. 예를 들면, 며칠 전 엄마와 병원을 다녀오며 느낀 감정들이다. 자식에 대한 사랑.
엄마는 나를 사랑한다. 간혹 사랑하지 않을 때도 있었겠지만, 결론적으로는 나를 사랑한다. 그리고 그것은 내 나이가 들면서 더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엄마는 내게 말한다. 본인보다 날 더 사랑한다고. 내가 살아있음에 안도한다고. 자기 자신보다 사랑할 수 있는 존재는 무엇일까, 나는 가끔 그 문장에 대해 깊이 생각한다.
며칠 전 엄마와 병원 앞에 있는 설렁탕 집을 지나쳤다. 에세이에도 썼듯, 울면서도, 눈물을 꾹 참으며 먹던 그 설렁탕 집. 엄마는 그 설렁탕집을 보면 어떤 것이 생각날까.
하루는 입원이 길어지자 병원밥에 질린 나를 위해 엄마는 그 설렁탕을 사러 갔다. 그 사이 주치의 선생님이 새로운 결과를 가지고 병실에 찾아왔고, 나는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을 쏟아내는 그 입을 한참 바라봤다. 왜 그렇게 이야기해요. 나는 선생님 환자인데. 좋은 말을 해줘야죠. 아무리 죽을 수 있어도, 그렇게 얘기하면 저는 어떡해요. 생각하면서. 뒤늦게 설렁탕을 포장해온 엄마가 테이블에 그것을 내려놓으면서 엉엉 울던 장면을 나는 잊지 못한다. 그 후로 내게 그 설렁탕집은 수없이 먹었지만 그 장면으로 연결되는 음식이 되었다.
엄마는 내게 대신 아파주고 싶다는 말을 하거나, 내가 길에서 헤맬 때 답을 제시해주는 사람은 아녔다. 고민을 털어놓아도 이리로 가는 게 더 좋겠다, 해결책을 제시해주거나 그것은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라고 조언을 해주지도 않았다. 그저 내가 걷는 길을 바라봐주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내가 늪에 빠졌을 때 별 고민 없이 그 속으로 들어와 주는 사람. 내가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가만히 손을 잡아주는 사람. 내가 아는 사람 중 제일 사랑스럽고, 강하고, 나의 편인 사람.
나는 자식이 없고, 앞으로도 없을 가능성이 더 많으니 아마 그 사랑을 알지 못할 것이다. 나의 분신 같은 아이에 대한 사랑. 하지만, 그 알지 못하는 사랑까지 모아 엄마를 사랑해야지. 엄마가 나를 사랑했듯이, 나도 엄마를 사랑해야지. 점점 엄마의 키가 줄어들고, 주름이 깊어져 가고, 흰머리가 너무 많아져 염색을 포기하고, 다시 아이로 돌아가게 되는 일이 있어도 사랑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