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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 이야기 4: 먹고사는 은혜

by 이효재

<창세기 1:9~13>

"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


현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이 있습니다. 하도 뿌리가 깊어서 모든 사람들이 진리라고 여기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조금만 깊이 생각해 봐도 진리가 아님을 금방 알 수 있는 허상입니다.


그것은 바로 "먹고사는 것은 각자의 책임이다"는 믿음입니다. 내가 먹고살지 못하는 현실이 닥친다면 그것은 내 노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므로 전적으로 내 책임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은 성경의 가르침에 어긋납니다. 인류 역사에서도 이런 믿음은 자본주의가 발전한 지난 300여 년 사이에 만들어진 사기에 가까운 신념입니다.


창조 이야기는 이런 신념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고발합니다. 창조 이야기는 우리가 먹고사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의 책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창조의 셋째 날, 하나님은 앞으로 창조될 생명들이 거주하고 먹고살 터전인 뭍(마른땅)을 만드셨습니다. 창조 시작 전 땅은 깊은 물에 덮여 있었습니다(창 1:2). 하나님은 둘째 날 만드신 궁창(하늘 공간) 아래에 있는 물을 향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시편 기자는 이 명령을 생생하게 표현합니다. “주께서 땅의 경계를 정하시며(시 74:17).” “주께서 바다의 파도를 다스리시며(시 89:9).” “주께서 물의 경계를 정하여 넘치지 못하게 하시며 다시 돌아와 땅을 덮지 못하게 하셨나이다(시 104:9).”


물아래 잠겨있던 땅을 끌어올려 마른땅을 만드신 하나님은 땅에게 명령하셨습니다.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땅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장차 동물과 사람이 먹을 양식을 생산했습니다.


땅은 하나님으로부터 능력을 부여받아 지금도 생명의 양식을 생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땅을 만들고 우리에게 양식을 주시는데, 우리는 내 능력으로 일한 덕분에 먹고산다고 착각합니다. 땅이 양식을 내지 않으면 우리의 노고는 헛수고입니다.


우리는 셋째 날 창조 이야기에서 우리의 생명은 땅을 지으신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지혜를 배웁니다. 우리가 먹고사는 것은 전적으로 창조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이 땅에 있는 모든 생명들이 먹고살 수 있는 넉넉한 양식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 기적을 행하기 전에 생명의 양식을 주신 창조주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감사의 기도는 생명을 충만케 하는 은혜의 통로입니다. 예수님의 감사 기도는 오래전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던 말씀의 약속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 정착할 광야의 백성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내 명령을 너희가 만일 청종하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섬기면, 여호와께서 너희의 땅에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 또 가축을 위하여 들에 풀이 나게 하시리니 네가 먹고 배부를 것이라(신 11:13-15).”


먹고살려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의 노동은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의 은혜를 받는 행위입니다. 감사하고 기도하며 일해서 함께 잘 먹고 잘 삽시다.


창조주 하나님은 동물과 사람을 창조하시기 전에 이 생명체들이 먹고살 양식을 셋째 날에 만드셨습니다. 덕분에 사람들은 충분히 먹을 수 있는 양식을 땅으로부터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노동은 하나님이 주시는 양식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행위입니다. 우리가 먹고살려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이렇게 일해서 먹고살면 다른 사람들이 먹어야 할 양식을 빼앗을 필요도 없고 그럴 수도 없습니다. 땅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세상 모든 사람들이 먹고살 양식을 내어주는데 우리가 구태여 다른 사람들의 양식을 탐낼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구상의 많은 사람들이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도 누군가는 먹을 것이 많고, 누군가는 먹을 것이 부족해서 심각한 불균형과 불평과 불만이 있습니다. 모든 전쟁의 원인입니다. 이것은 결코 창조주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먹을 것을 충분히 주셨습니다. 광야에서 만나를 주신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 자신임을 깨우쳐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에게 필요한 만큼만 걷어서 먹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모든 사람들이 굶주리지 않고 공평하게 배부르게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필요 이상의 것을 소유하려 합니다. 사람들은 내가 열심히 일해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을 자유로운 권리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이런 믿음은 인류의 역사에서 오래된 것이 아니라 근대 서구 문명이 만들어낸 부자연스러운 개념입니다.


영국의 17세기 철학자 존 로크(John Locke)는 <자유론>에서 처음으로 개인의 노력으로 취득한 토지에 대한 개인 소유권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전까지 땅은 비록 개인의 소유일지라도 사람들이 함께 일해서 먹고 살아가는 공유지라는 개념이 강했습니다. 사람들은 땅을 생명의 근원으로 신성시했습니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 토지의 자유로운 사적 소유가 허락되면서 토디는 경제의 3대 생산 요소 가운데 하나로 탈신성화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땅으로부터 분리되면서 개인의 생존은 전적으로 개인의 책임이라는 의식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지금의 자유로운 토지 거래와 부동산 투기는 로크가 제기한 '소유의 자유'가 낳은 결과물입니다.


땅은 모든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이 양식을 내어주기 위해 만든 피조물이라는 창조 이야기는 현대인들에게 매우 낯설게 들릴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공산주의 이념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공평과 정의의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창조의 하나님은 특정한 사람들만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당신의 피조물들을 골고루 사랑하십니다. 모두에게 먹을 것을 주십니다. 이러한 믿음에 근거해 예수님은 무엇을 먹고 마시고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다 알고 계십니다(마 6:31,32).


하나님을 믿게 되면 함께 먹고 함께 살아가는 삶을 회복합니다.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으로 일어난 현상 가운데 하나가 성도들의 재산 공유입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누군가 굶주린 사람이 없도록 서로의 재산을 함께 사용했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실천해야 하는 신앙 고백이었습니다.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공평과 정의의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에게 가난한 이웃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야 한다고 강조하십니다. 이것이 원래 십일조의 의미입니다.


“매 삼 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 분의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거류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신 14:28-29).”


창조 이야기를 읽으면 이 세상이 낯설게 느껴져야 정상입니다. 먹고사는 생존의 문제를 오롯이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이 피곤하고 사나운 세상의 질서에 의문을 던져야 합니다. 만약 창조 이야기가 낯설게만 들린다면, 당신의 영혼은 이미 탁락한 자본주의에 너무 익숙해져 있을지도 모릅니다. (글/이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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