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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 이야기 3: 평등한 세상

by 이효재

<창세기 1:6~8>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우리는 '하늘'이란 단어에서 결코 도달할 수 없는 특별한 곳으로 신비감 혹은 신성감을 느낍니다. 사람들은 땅에서 일어날 수 없고 상상 속에서 가능한 판타지들을 하늘을 배경으로 꾸며냅니다. '해리포터'나 '나니아 연대기'같은 판타지 소설들은 신비로움을 위해 하늘을 마음껏 활용합니다.


우리 조상들은 정화수 한 그릇 떠놓고 하늘을 향해 두 손 모아 정성껏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늘의 신령한 신이 소원을 이루어주실 것을 기대하면서. 현대인들도 세상에서 어려움에 봉착하면 하늘을 바라보며 한탄하거나 기도합니다.


그러나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는 하늘을 향한 신비로운 기대감을 산산조각 냅니다. 하늘은 신들의 세계가 펼쳐지는 공간이 아니라 철저하게 우리를 위한 기능적 공간임을 창조이야기는 강조합니다.


창조의 둘째 날에 하나님은 땅을 뒤덮고 있던 물을 갈라서 궁창, 곧 하늘(혹은 공중)이라고 말하는 빈 공간을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이 물을 나눠서 한쪽은 하늘 위에 있고 다른 한쪽은 땅 위에 남게 하셨습니다.


하늘 위의 물은 공중의 습기입니다. 비가 되고 눈이 되어 땅 위의 생명들에게 물을 제공합니다. 하늘 위의 물과 하늘 아래의 물 사이에 공간이 생겼습니다. 두 물 사이에 만들어진 공간에는 바람이 불어 새들이 날아다닐 수 있게 되었고, 땅 위의 물은 물고기가 헤엄칠 공간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둘째 날에 궁창을 만드셨지만 이 날에는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문구가 없습니다. 하늘(궁창) 창조의 목적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목적은 셋째 날에 이뤄질 것입니다.


사람들은 간혹 하늘을 숭배의 대상으로 바라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앞으로 창조하실 생명체들을 살게 하는 특별하고 위대한 기능을 수행할 도구로 하늘을 만드셨습니다.


창조 이야기는 우상 숭배를 금지하는 하나님의 단호한 명령과 깊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창세기가 기록되던 당시의 고대 창조 신화들은 하늘을 관장하는 신들을 경배하라고 사람들에게 요구했습니다.


이집트는 ‘누트’를, 바벨론은 ‘마르둑’을, 아시리아는 ‘아슈르’를, 그리스는 ‘제우스’를 각각 하늘의 신으로 숭배했습니다. 이 신들은 하늘에서 다른 신들과 전쟁에서 이겨 하늘의 주도권을 가지고 세상을 다스렸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창조 이야기는 하늘도 창조주 하나님에게 순종해야 하는 피조물이라고 선포합니다. 하늘은 하나님이 앞으로 창조될 세상의 모든 생명들을 위해 만드신 환경이지 신적 존재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하늘을 만드신 목적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물 위에 궁궐을 높이 지으시고, 구름으로 병거를 삼으시고 바람 날개를 타고 다니시며, 바람을 시켜 명령을 전하시고 번갯불에게 심부름을 시키시며(시 104:3,4).” 하늘은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하늘은 사람이 직접 통제할 수 없어 신비로워 보일지라도 결코 숭배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하늘의 천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골 2:18). 사도 요한은 종말의 역사를 계시해 준 하늘의 천사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했으나 그 천사는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계 19:10)”고 만류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경배할 대상은 우리의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에게 그를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아무리 위대해 보여도 하나님의 심부름꾼입니다.


창조 이야기는 천지의 그 어떤 것도 신적 우월성을 갖지 못하는 하나님의 피조물의 자격만 갖추고 있으며 하나님 앞에서는 하늘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들이 동일한 가치를 가지고 있을 뿐임을 선포합니다. 이처럼 창조 이야기는 민주적 평등성이라는 급진적 사상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이 지금의 형태로 기록된 기원전 6세기는 바벨론 제국이 지배하던 시대였습니다. 바벨론 사람들은 하늘의 제왕 마르둑 신이 세상을 통치하고 있으며, 왕은 마르둑 신의 지상 대리인으로서 신적 권세를 가지고 백성들을 다르리는 존재로 숭배를 받았습니다.


이 시기에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했던 유대인들은 창조 이야기를 통해 이러한 바벨론 제국의 세계관을 정면으로 부정했습니다. 숭배의 대상은 오직 창조주 하나님 밖에 없으며, 하늘을 지배하는 마르둑 같은 신적 존재들도 없고, 따라서 신적 특권을 부여받은 사람도 없다고 유대인들은 믿었습니다.


따라서 왕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은 동등한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는 소명을 받은 평등한 존재일 뿐 어느 누구도 신으로부터 초월적 가치를 받지 않았다는 세계관입니다.


특별한 사람들의 존재론적 우월성은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기능적 역할이 다를 뿐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의 탁월함은 존재론적 차원이 아닌 기능적 차원에서 다뤄졌습니다.


이러한 세계관 덕분에 유대 사회에서는 다른 나라들과 달리 직위에 따른 권한과 책임의 차별성은 인정하되 특정 인간의 존재론적 가치를 차별하는 계급제도가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성경은 창세기부터 사람과 사회의 민주적 평등성을 주장합니다. 이것 없이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습니다.


안타깝게도 요즘 우리 시대는 다시 특권 계급 사회로 돌아가는 퇴행적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부익부 빈익빈의 양극화가 더욱 깊어지고, 교육을 통한 부와 권력의 세습이 노골적입니다.


피곤한 능력주의도 모자라서, 김동춘 교수가 고발한 것처럼, 돈 많은 집안 자녀들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시험능력주의가 한국 사회를 관통하고 있습니다. 강남 지역 출신 자녀들이 정관재계의 주요 자리들을 차지하는 비율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유권자들이 손바닥에 왕(王)을 쓰고 나온 윤석열 후보를 대통령으로 선출할 때, 대한민국은 이미 민주주의의 위기 상태에 있었습니다. 상당한 유권자들은 능력이 탁월하면 우리의 왕이 되어도 좋다는 암묵적 승인을 보냈던 것입니다. 실제로 이 사람은 지신의 언행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반국가세력이라는 무시무시한 딱지를 붙여 처벌하려 했습니다.


성경은 고대 시대부터 신비의 대상으로 숭배하던 하늘의 신적 권위를 박탈하고 생명들을 위한 공간으로 평가절하를 했지만, 요즘 시대는 거꾸로 특정인을 왕으로 삼으려는 비민주적 사고와 태도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능력을 상실하고 있습니다. 위험한 역사의 후퇴입니다.


우리는 창조 이야기에서 그 어떤 자연적 존재나 특정인에게 결단코 신적 권위를 부여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경고를 읽어내야 합니다. (글/이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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