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3~5>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창조의 첫째 날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흑암이 뒤덮고 있던 천지에 “빛이 있으라”라고 말씀하시니 빛이 생겼습니다. 3절의 히브리어 성경을 직역하면 이렇게 읽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빛이 있으리라." 그리고 빛이 있었다. 하나님은 천지가 떠나갈 것처럼 큰 소리로 명령한 것이 아니라 대화하듯 조용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대로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빛을 보시니 좋았습니다. 좋다는 말은 선하다(토브) 뜻입니다. 선하다는 말은 ‘보기에 좋다’, ‘기능을 잘하다’, ‘살기에 좋은 조건이다’는 등의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선하다는 단어는 철학적으로 신학적으로 사람이 살기에 좋은 상태를 지시하는 형용사입니다.
창조의 첫째 날 하나님이 어둠만 있던 땅에 빛을 창조하셨습니다. 빛은 어둠을 몰아내고 광명을 가져왔습니다. 빛은 생명의 필수 조건입니다. 빛은 생명을 낳고, 어둠은 죽음을 낳습니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에 빛을 비추심으로써 생명이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드셨습니다.
지금은 태양이 빛의 광선을 만들어 우리에게 보내주고 있지만, 창조의 첫째 날에는 아직 태양이 없던 상황이었습니다. 생명을 위한 가장 근본적 전제 조건인 빛을 태양이 아닌 하나님이 만드셨음을 창조 이야기는 강조합니다. 생명은 처음부터 하나님이 만드셨다는 메시지입니다. 빛은 사람이나 자연이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빛은 오직 하나님이 만들어서 우리에게 주시는 외부의 힘입니다. 우리가 만들어 사용하는 모든 빛은 하나님이 태초에 만드신 빛의 응용입니다.
사람이나 동물이 어두운 공간에 갇히면 몸과 마음에 병이 걸려 죽게 됩니다. 빛은 물리적 생명뿐만 아니라 영혼의 생명에도 직결됩니다. 악한 사람은 본능적으로 어두운 공간을 찾아다닙니다. 자신의 부끄럽고 정당하지 않은 모습이 밝은 세상에서 들키지 않으려고 숨깁니다. 그러나 영혼에 빛이 비치면 사람들은 꽁꽁 숨겨놓았던 죄악을 드러내어 회개하고 자유를 얻습니다.
하나님이 빛을 창조하셨다는 말씀은 이 세상이 오직 하나님이 만드신 빛 안에서만 생명을 누릴 수 있음을 강조합니다. 빛은 반생명적 어둠을 제거하고 진리 안에서 광명을 발견하고 모든 악을 이기고 상처를 치유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빛의 창조 이야기를 자세히 읽으면 빛의 탄생으로 어둠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빛을 창조하시면서 어둠을 없애지 않으셨을까요? 유대교 신학자 존 레벤슨(Jon Levenson)은 어둠과 밤을 하나님의 선한 창조 세계에서 물러나지 않고 세계를 창조 이전으로 되돌리려고 세계에 잔존하고 있는 악의 세력을 상징한다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창조가 완성되는 종말의 때에는 어둠의 밤이 결국 사라집니다(계 21:25; 22:5).
하나님은 빛과 어둠을 나누어 각각 낮과 밤이라고 부르시고 어둠의 밤과 빛의 낮이 교대로 나오게 하셨습니다. 어둠조차 하나님의 통제와 지배 아래에 있다는 뜻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여호와 하나님을 "빛도 짓고 어둠도 짓는" 분이라고 부릅니다(사 45:7). 시편 기자는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같음이니라"라고 고백합니다(시 139: 12).
어둠과 같은 혹독한 아픔과 상처가 우리 인생에 예외 없이 찾아옵니다. 우리의 생명을 해치는 신체적 정신적 영적 악을 경험할 때 우리는 인생을 짓누르는 고통 아래 신음합니다. 이런 고통은 그 자체로 아무런 유익이 없는 무(無)의 경험입니다. 고통이 두려운 것은 우리가 창조 이전의 무(無)로 환원될 것에 대한 존재의 본능적 두려움입니다. 그러나 이때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셨고, 우리를 무(無)로 돌리려는 악은 하나님 안에서 통제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 사실을 확증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시는 생명의 빛이십니다(요 8:12; 고후 4:6).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고 그리스도를 잃은 세상은 잠시 어두워졌지만, 하나님은 그를 무덤에서 생명으로 일으켜 다시 빛을 비춰주셨습니다. 세상에는 영원한 어둠과 죽음이 있을 수 없음을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명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어둡고 악해도 빛이신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둠은 빛을 막을 수도 이길 수도 없습니다. 밤이 오면 반드시 낮이 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라질 어둠의 편에 서지 말고 언제나 빛과 함께 해야 합니다. 절망과 좌절과 미움 같은 마음의 어둠이 찾아오면 빨리 예수님의 빛으로 달려와 어둠을 몰아내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탄핵 정국은 어둠의 길고 깊은 그림자를 이 시대에 드리우고 있습니다. 어둠이 깊을수록 우리는 빛의 편에 서서 어둠이 온 땅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적극적으로 싸워야 합니다. 무엇보다 어둠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아야 합니다. 어둠의 언어는 죽음의 언어입니다.
지난달 초 우연히 광화문 사거리에서 서울시청 앞 광장까지 모든 도로를 막고 탄핵 반대를 요구하는 정치 집회를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전광훈 씨가 진행하는 집회에서 들려오는 구호와 손팻말 구호는 끔찍했습니다. "OOO 죽여라"는 등의 언어가 난무했습니다. 확성기에서는 분노를 넘어선 증오의 발언들이 쏟아졌습니다. 그분들의 얼굴 표정은 시종일과 어둡고 우울하고 불안했습니다. 저는 그들의 언어에서 죽음의 기운을 느꼈습니다. 서울서부지원 난동 사태는 이들이 사용하는 어둠의 언어들이 낳은 폭력의 열매입니다. 하나님이 빛을 창조하기 이전에 땅을 덮고 있던 밤의 세계로 되돌아간 것입니다.
'전광훈 집회'를 목격한 저는 세종문화회관을 지나 집에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광화문 앞에서 열리고 있던 탄핵 지지 집회를 통과하게 되었습니다. 여기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습니다. 전혀 유명하지 않은 평범한 젊은 남녀들이 단상에 올라 탄핵 이후에 살고 싶은 세상에 대한 기대와 꿈을 이야기하며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가자고 차근차근 호소했습니다. 어둠과 죽음의 언어보다는 밝고 희망찬 언어가 주조를 이루었습니다. 사람들은 응원봉 빛을 흔들며 노래하고 경청하고 구호를 외쳤습니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전광훈 집회'가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 중심으로 예배 형식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빛을 창조하시고 생명의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세상에 전하는 교회가 어둠과 죽음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아이러니는 비극입니다. 어둠과 죽음은 폭력적입니다. 고달픈 삶에서 위로를 받고 희망을 얻으려는 사람들은 이런 교회에 가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빛을 창조하셨다는 창조 이야기는 이런 폭력으로부터 세상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전합니다. 생명의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에게 빛으로 들어와 어둠과 싸워 이기는 삶을 살라고 명령합니다. 빛의 언어로 사고하고 말하고 행동하라고 말입니다.
의지적으로 빛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으면 우리는 또 다른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이 됩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의 명령으로 유대인들을 수용소에서 학살하고도 죄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교묘하게 왜곡된 죽음의 언어를 사용하면서 생각하지 않고 공감하지 않고 진실을 말하지 않아 히틀러의 살인청부를 아무런 죄책감 없이 수행했다고 고발했습니다. (글/이효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