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탄날 뻔했던 위기
어제가 우리 부부의 결혼 35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아내와 함께 단골 식당에서 저녁을 먹으면서 특별한 감정이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그냥 편하고 좋았다. 오래 된 친구 사이가 그렇듯이.
대학 동아리 선후배로 만나 부부의 연을 맺고 함께 가정을 이루고 행복하게 살아왔다. 물론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우리는 장성한 세 아이의 부모가 되었다. 두 며느리도 새식구로 맞아들였다. 우리 결혼식에서 주례 목사님께서 말씀하셨다.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을 때까지 마주 잡은 손을 놓지 말고 함께 걸어가라." 우리는 그 말씀을 따라 살아왔다.
내 카톡에 저장된 아내의 이름은 '베프'다. 내 인생에서 최고의 친구, 곧 베스트 프렌드라는 뜻이다. 아내의 카톡에 저장된 내 이름도 '베프'다. 몇 년 전에 아내가 '베프'라는 이름을 지우고 '남편'이라고 쓴 것에 섭섭함을 표시하자 당장 '베프'로 원상 복구해 주었다.
우리가 처음 만날 때 나는 아내의 '하늘 같은' 선배였다. 나이로는 6년 차이고 대학 학번으로는 4년 차이라서 서로 큰 격차를 느꼈다. 내가 먼저 아내에게 다가가 청혼을 했다. 아내는 나의 청혼을 그 자리에서 망설임 없이 받아주었다. 1989년 7월 초 서울 사당동의 '장미 빛 인생'이란 간판이 걸린 카페에서 우리의 결혼은 결정되었다. 아무래도 내가 카페를 잘 택했던 것 같다.
결혼 후 10년 동안 나는 남편, 그녀는 아내의 역할에 충실했다. 나는 직장 일 때문에 늘 바빴고 가정에 소홀했다. 아내는 세 아이를 낳고 양육하고 박사과정 공부를 하고 강사로 뛰어다니느라 나보다 더 바쁘게 살았다. 잠을 제대로 잔 날이 거의 없을 정도로 시간을 아껴가며 살았다.
우리 다섯 명의 가족이 한 자리에 앉아 밥을 먹는 일도 한 달에 한두 번 정도가 고작이었다. 아내는 가정을 지키고 나는 가정 밖 일터를 지키는데 집중했다. 자연스럽게 대화는 줄어들고 각자 맡은 역할에만 충실할 따름이었다. 나는 일해서 돈을 벌어오고, 아내는 아이들을 키우며 학문의 길을 걸었다. 결혼 후 우리는 부부였지만 친구는 아니었다. 각자의 친구는 가정 밖에 있었다. 우리는 그냥 남편 아내로 살아가는 성실한 부부였다.
우리는 각자의 삶에 충실했지만 각자 어떤 꿈을 꾸고 어떤 삶을 살고 싶고 아이들을 어떻게 키우고 싶은지 서로의 생각을 몰랐다. 나는 밤늦게 집에 들어와 TV를 보다 피곤에 지쳐 곯아떨어지기 일쑤였고, 아내는 그런 나를 보며 서서히 마음의 문을 닫고 있었다. 밖으로 보기에는 단란한 가정 같았지만 속으로는 무너지고 있었다. 위기가 우리 가정에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내가 12년 동안 잘 다니던 직장을 갑자기 떠났다. 내 나이 마흔이었다. 삶의 의미를 찾으며 방황하는 중년 사춘기가 온 것이다. 온 가족이 함께 미국으로 이사 갔다. 일 년 정도 머물면서 아내는 미국에서 박사 후 과정을 밟고 나는 쉬면서 다음 인생길을 모색할 계획이었다. 미국 위스콘신 메디슨의 대학 기숙사에 살면서 나는 하루 세끼 집에서 밥을 먹는 삼식이가 되었다. 매일 가족들과 함께 밥 먹는 일이 처음에는 좋았지만 하루하루가 지나면서 점점 불편해졌다.
아내와 나는 밥 먹을 때마다 말다툼을 했다. 아내는 한국에서 결혼 생활 10년 동안 속에 삭혀왔던 불만을 매일 쏟아냈다. 나는 나름대로 남편과 아빠로서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아내는 나 때문에 너무 힘들었다고 반박했다. 10년 전 일을 마치 어제 일처럼 자세히 기억하고 나를 몰아세웠다. 아내는 법정에 선 공판 검사 역할을 하고 나는 피고인의 처지가 되었다. 판사는 아마 하나님이셨을 것이다.
다른 것은 다 용서를 받았지만 지금까지도 아내의 용서를 받지 못하고 있는 내 죄(?)가 있는데 그때부터 지금까지 아내는 그 이야기만 나오면 눈물을 글썽인다. 이 죄는 나의 원죄가 되어버렸다. 세 아이를 낳을 때 나는 한 번도 병원 분만실 아내 옆에 없었다. 신문기자였던 나는 아이들이 세상에 나오는 순간에 병원에서 멀리 떨어진 취재 현장에 있었다.
막내가 태어날 때에는 어떻게 해서든지 아내 옆에 있으려 했지만 분만 30분 전에 선배로부터 빨리 가서 사건 보고를 하라는 독촉을 받았다. 아이가 곧 나올 것 같으니 조금만 시간을 달라고 했지만 "네가 애 낳냐?"라는 욕만 잔뜩 얻어먹고 할 수 없이 병원문을 나섰다. 기자실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장모님으로부터 아내가 출산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딸을 얻은 아빠의 기쁨과 빵점짜리 남편으로 전락한 비극적(?) 운명을 동시에 받아들여야 했다. 아내는 "더 이상 안 낳는다"고 선언했다. 나는 만회할 기회를 영원히 잃어버렸다.
하여튼 아내는 혼자 세 아이를 낳으면서 내 빈자리가 너무 쓸쓸하고 힘들었다고 토로했다. 미국 생활을 하면서 아내는 처음으로 가슴속에 깊이 묻어놓았던 말을 꺼내면서 펑펑 울었다. 나는 당황스러웠다. 나는 나름 직장인으로서 모범적으로 살면서 가정을 지키려고 최선의 노력을 다 했는데 왜 비난을 받아야 하는지 몰랐다. 나는 아내를 위로할 줄 몰랐다. 오직 내 입장만을 변명하기만 했다.
이렇게 미국에서 일 년 반을 가족들과 함께 하루 종일 같이 살면서 우리 부부는 거의 매일 서로에게 섭섭하고 원망스러운 이야기들을 주고받았다. 그때 참 많이 싸우고 많이 힘들었다. 나는 억울했고 아내가 미웠다. 아내도 나에게 같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각자 자기 관점에서 이야기했고 한 치의 양보 없이 팽팽하게 맞섰다. 분명히 우리는 서로 이야기를 들어주고 이해하려고 노력했지만 나는 자존심만 상했다.
20년도 더 지난 일을 내가 이렇게 소상히 기억하는 것은 그때가 나에게 가장 큰 위기였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이 여자랑 더 이상 같이 못 살겠다"는 생각이 내 마음속에 떠올랐다. 아마 아내는 오래전부터 생각했지만 아이들과 부모님 생각 때문에 꾹 참고 있었을 것이다. 인생의 다음 단계를 구상하러 미국에 가서 쉬면서 생각을 정리하려 했다가 하마터면 가정이 파탄 날 뻔했다. (다음 에피소드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