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직장생활 후 은퇴, 정산을 하고 나니 집과 차 3대와 공무원 연금만 남았다. 자산은 얼마 되지 않았다. 자식들 집 한 채씩만 해 줄 수 있다면 딱 좋을 텐데......허전한 일이었다. 자식들은 빚 없이 이 정도 유지한 것만으로도 수고했다 한다.
하지만 다시 계산해 보니 우리가 가진 자산은 제법 많았다.가고 싶은 곳은 걸어서 갈 수 있는 튼튼한 다리도 있고 등산과 차박의 경험이 있었고 상당한 수준의 추억이 있었다. 그리고 7700명의 회원을 소유한 밴드(페이지)에 많은 글들이 남아있다.
우리가 계산하기에는 현금 재산보다 더 가치가 있다.
자식들은 부산 집에 거주하고 우리 부부는 전남 고흥으로 귀촌을 했다. 우리 부부의 거주지는 1년간 경험을 미리 해볼 수 있는 귀농어인의 집이다.입주관리비 월 10만 원, 전기세 수도세는 별도로 계산한다. 부산집은 관리비만 해도 귀농어인의 집 두 배다. 이것도 우리 부부가 부담한다. 차는 딸, 아들, 우리 부부가 한 대씩 나누어 가지기로 했다.
딸은 서울에서 공부하여 졸업한 후 여러 직장을 다녔지만 여의치 않아 늦은 나이에 공무원시험을 쳤다. 8살 아래인 아들은 대학4학년 재학 중이었다.
나는 정년퇴직을 할 생각이었다. 퇴직을 하기 전에 작은 사건이 하나 있었다. 2년을 버티려면 버텨낼 수 있었다. 퇴직이 인생의 은퇴가 아니라고 생각하니 인생 2막도 빠른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차박여행가로 10년 정도 전국여행을 했다. 육지나 제주도 등 큰 섬 위주였다. 그러나 작은 섬 여행의 매력에도 푹 빠졌고 수많은 둘레길도 걷고 싶어졌다. 나이를 더 먹으면 산을 오를 수는 없으니 2년 일찍 퇴직해도 좋겠다 싶었다.
우리의 인생 2막 차박여행은 수입은 없고 많은 유류비와 도로비를 지불해야 한다. 먼 거리를 ㅇㆍㄷ가던 퇴직 전보다는 한 곳에서 오래 머무르면서 비용 절약을 하기로 했다. 우선 귀촌한 전라남도를 중심으로 여행을 해나가기로 했다. 다음에는 충청도, 강원도 순서로 1-2년간 살 수도 있다.
경제적 문제는 쉽지 않았다. 딸이 임용을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고 정규직으로 취업을 할 수는 없고 그나마 시간이 비교적 자유로운 쿠팡에서 일주일에 서너 번씩 일을 했다. 생활비는 스스로 해결하고 주거비는 우리 부부가 부담해야 했다.
사실 일거리가 있었으면 좋겠다 하고 생각했다.
일손이 부족하다고 알려진 농촌이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드물었다. 일을 안 해도 먹고는 살 수 있으니 아무 일이라도 하려고 한 것도 아니었다.
농촌의 일을 보니 관리기로 로터리치고 밭을 곡식을 심도록 만들어 주는 일은 일거리가 있는데
맨몸으로 노동만 하는 일거리는 없었다.
고추 심고 마늘 수확하는 바쁜 일이 있을 때는 외국인 근로자들이 왔다. 젊은 그들은 농사일을 익숙하게 해냈고 쉽게 부를 수 있어서 대농들은 필요할 때 그들을 고용했다.
나머지 80%의 마을 분들은 노령인구로 농사를 많이 짓는 분들은 없었다. 새벽에 일찍 본인들의 밭에서 일을 하면 그만이었다. 모를 심는 것도 벼를 베는 것도 이양기나 콤바인이 하고 농약을 치는 것도 드론을 부르면 되었다.
동네 입구 귀향하신 분이 살고 계셨다. 그분은 매일 일하러 가시는 것 같았다. 그분은 공공근로를 하신다고 했다. 몸으로 하는 일이라 남편도 가능한 일이었다. 상반기 하반기 신청을 받는데 상반기는 끝이 났고 하반기에 신청해 보라고 했다. 알아보니 우리는 공무원연금을 받으니 공공근로의 자격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정말 급하게 노동력이 필요한 분이 있어서 일을 힐 적이 있었다. 모 나르기로 남편이 하루 종일 먼지와 흙을 덮어쓰고 일을 하여15만 원의 수입을 얻었다. 그러나 그 일이 마지막이었다. 또 한 번 도배장판을 한 적이 있었는데 거기서 40만 원 의 수입을 올렸고 작년 도합 55만 원의 수입이 있었다.
이곳에서 일자리는 어떤 게 있을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어느 것일까?
사실 내가 고수입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있다. 기간제 교사이다. 퇴직 1년이 지났으니 서류를 내볼 수는 있다. 내가 사랑했던 일이었으사 현직에 있을 때 최선을 다한지라 더 이상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다른 일자리는?
주간 노인보호센터정도 되는 것 같았다. 그러려면 사회복지사와 요양보호사자격이 필요했다.
그런데 1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고 비용도 상당히 발생했다.그리고 직장에 매이면 차박여행은 할 수가 없다. 인생을 낭비하는 일이었다.
그러던 중 고정수입 비슷 힐 것이 발생했다. 우리가 운영하고 있는 밴드를 구독하는 지인이 월간지에 원고를 내고 월 20만 원의 수입을 얻을 수 있게 추천해 준 것이다. 이 밴드(페이지)를 운영하면서 글을 끄적끄적 많이도 올렸지만 잡지에 매월 투고를 한다는 것은 자신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도전해 보기로 하였다. 제목은 한지웅성성희 부부의 차박여행이다. 우리가 가던 대로 쓰던 대로 하면 된다. 숟가락 하나도 더 올릴 필요도 없다.
하지만 밴드는 처음 쓰는 글 자체가 퇴고다. 산행과 여행에 대한 안내와 나의 느낌만 적으면 그만이다.
돈을 받는 글은 다르다. 개요도 짜고 수정도 많이 한다. 남편도 고치고 두 번, 세 번 아니 여러 번 수정을 한다. 그러면 문장 앞뒤가 바뀌기도 하고 삭제되기도 하며 좀 다른 글로 바뀌기도 한다. 맞춤법은 딸이 한 번 본다. 그래도 이번에 퇴짜를 맞지 않을까. 마음 졸인다. 나는 전문 작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번까지 총 5회의 원고를 적었다.계속 이어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또 하나의 수입이 생겼다. 고흥귀촌귀어 SNS행복작가단에 선정된 것이다.
사진 5장 이상 500자 이상의 글을 나의 SNS나 그린대로라는 사이트에 올리면 된다.1년의 기간 동안 동안 월 15만 원의 원고료가 지급된다. 다음 해에도 계속 도전할 수 있어 좋다.이 것은 비교적 쉬운 일이다. 생활자체를 매일 글로 쓰니 한 달에 세편이 아니라 10편도 쓸 수 있다. 그래서 현재는 고정 수입이 35만 원이다.
그 사이 딸은 발령이 나서 근무한다. 부산 집에 들어가는 관리비나 가스비는 딸의 몫으로 오래된 자동차 하나도 딸의 몫으로 넘어갔다.
작가의 수입은 모두 저축이 가능하다. 그것은 우리 부부만을 위해 쓸 것이다.
이 35만 원의 수입은 너무 많은 행복을 준다. 나의 꿈을 실현시켜 주는 듯하여 부지런히 정진한다. 소홀했던 독서도 매일 하게 해 준다. 작년에 좀 시들했던 차박여행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꽃 따라 신록 따라 단풍 따라 산을 찾는 것은 계속 이어나가면서 서해랑길도 한 달에 두 번씩 찾는다. 그리고 윤선도 정약용 김삿갓 등 선인들의 삶과 자면에 조화되며 살아가는 그들의 지혜도 배운다.
새로운 직업 나는 작가다. 선생님이라는 호칭보다는 작가님이라는 호칭이 더 좋다.
오늘은 과거를 소환해 봅니다. 처음 임용되었을 때의 설렘과 행복새로운 길을 걷는 열정도 있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