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한 친척 동생의 방문으로 남파랑길 70코스를 걸었습니다. 남파랑길 70코스의 시작점은 녹동터미널이지만 녹동구항의 음식특화거리에서 아침식사를 했기에 거기서 출발했습니다. 녹동구항에서 다리만 건너면 소록도, 또 다리 하나를 더 건너면 거금도입니다. 그래서 해안선을 걷는 이 길엔 소록도와 거금도도 따라다닙니다.
녹동구항
녹동구항, 녹동신항을 지나면 풍경은 금방 시골스러운 분위기로 바뀝니다.
바다냄새를 맡으며 방죽길을 걸으면 기분이 참 좋습니다.
마을 안쪽을 돌아 나오고 해안선을 걷고 하는 사이작은 공원이 나타납니다.
오마간척한센이충소공원
오마간척한센인 추모공원이라 적힌 아치형 대문 안으로 언덕길이 있고 몇 개의 조형물이 보입니다.
한센인추모공원에 웬 말이 있을까? 뜬금없다는 생각이 들어 안내판을 읽어보니 이곳은 원래 5개의 섬이었다고 합니다. 밀물이면 바다가 되고 썰물때면 갯벌이 드러나 섬 모두가 연결되는 육지가 되었는데 이 5개의 섬이 말을 형상을 하고 있어 오마도였고 간척사업이 끝나 육지가 된 지금은 오마리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5개 섬을 이은 간척지가 바로 이청준작가의 당신들의 천국의 배경지라고 합니다.
일제강점기에 한센인들이 분리되어 소록도에 수감되었고 그들은 인권유린을 당하며 섬 속에서 갇혀 살아야만 했습니다. 1960년도 까지 계속되었고 소록도 주민은 5000명가량 되었다고 한다. 이들 중 음성 환자는 3300여 명이었고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2000명가량 되었다고 합니다.
1961년 정부와 소록도당국에서 추진한. 한센인 자립사업으로 오마도 간척 사업은 시작되었는데
그 당시 군인출신인 조창원 소록도 병원장은 바다를 간척하여 음성환자촌을 만들자 제안하였고 소록도란 섬을 떠나 내 땅과 집을 갖고 싶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찬성하였다고 합니다. 작업이 가능한 2000명이 참여하여 손수레와 곡괭이 삽 등 기구를 이용하여 둑을 쌓기 시작하였답니다. 그러나 썰물 때 갖다 부은 돌들이 밀물이 되었다가 물이 빠져나가면 휩쓸려 나가 버렸고 그러면 다시 쌓고 반복해 나가며 1000m가 넘는 둑을 쌓아갔다고 합니다. 작업도중 어려운 일들을 겪기도 했지만. 내 땅을 갖고 육지에서 살겠다는 희망으로 똘똘 뭉쳐. 순조롭게 둑을 쌓아가던 중 한센인들과 이웃마을에 살기 싫다는 육지 주민들의 반대가 심해졌다고 합니다. 그 당시 실시되었던 총선거를 의식한 정부가 주민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형식을 갖추어 한센인들을 공사에서 손 떼게 하고 그 후로는 보사부에서 전라남도 산하 기관으로 공사 주체가 바뀌어 버렸다 합니다.3년간 몸과 마음을 바쳐 일했던 그들의 꿈은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합니다.
새 보금자리를 마련하고자 했던 한센인들의 꿈이 물거품이 된 이 자리에 31억 원의 공사비를 들여 2012년 6월, 오마간척한센인추모공원이 세워졌다 합니다.
위 건물은 테마관으로 노동현장 사진자료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일을 하다 잠시 휴식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당시 일하던 모습을 재현한 사진이라고 합니다. 주변의 산을 깨서 손수레로 1km 떨어진 방조제까지 날랐다 합니다.
조형물 뒤편의 글입니다. 김형주 부단장이 쓰신 글입니다.
소록도에서 애환의 삶을 사셨던 한하운 시인의 보리피리와 시인의 모습입니다.
멀리 오마 간척지가 보입니다. 더 멀 리에 있는 내가 사는 옆 동네 고옥리의 바둑판같은 들과 매곡리의 넓은 들이 오마 간척지라는 사실도 깨닫습니다.
당시 한센인에 대한 편견은 너무 심해서 차별했던 일반인들과 정부의 무책임에 가슴이 아픕니다. 그들의 꿈을 너무 무참하게 밟아버렸습니다.
오마간척 한센인추모공원을 지나 제2방조제. 제3방조제를 지나 백석마을에 도착했습니다.
짧고 어렵지 않은 길이었지만 우연히 길 가다 만난 오마한센인추모공원에서 가슴 아픈 역사를 되새겨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