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올 겨울 두번째 방문

by 성희


​우리 부부는 퇴직 후 ‘차박’으로 제2의 인생을 살겠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아들이 서른이 될 때까지 뒷바라지가 이어질 줄은 미처 몰랐지요. 결국 60세부터 그리던 10년의 계획은, 김형석 교수님처럼 65세부터 75세까지 가장 아름다운 삶을 누리는 것으로 수정했습니다. 올해만큼은 우리 부부가 꼭 자유로운 몸이 되어 길 위로 나설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봅니다. 아마 그렇게 되겠지요?

​고흥 귀촌 생활을 정리하고 부산으로 돌아온 뒤, 참 오랜만에 온 가족이 함께 지냈습니다. 처음엔 다소 서먹했던 공기가 이제 막 익숙하고 편안해지려는데, 다시 예정된 이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부산 집은 앞으로 10년간 딸의 신혼집으로 내어주고, 아들을 분가시킨 뒤 저희 부부는 본격적인 **‘글로벌 차박’**에 나설 예정입니다.

​여름에는 홋카이도나 강원도의 고원지대를 찾아가고, 겨울에는 제주의 따스한 품에 안기는 삶. 꽃피는 봄과 단풍 드는 가을의 절경 속으로 깊숙이 파고드는 여정. 자연의 시계를 따라 흐르는 그 길을 꿈꿔봅니다.

​이번 겨울은 남편이 먼저 제주에서 홀로 차박을 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지난 12월, 남편과 함께 고흥에서 배를 타고 제주로 들어왔다가 아이들을 챙기려 육지로 나온 후 벌써 두 번째 제주행입니다. 한 달에 닷새씩 제주로 향하는 길. 이번에는 붉은 동백과 노란 유채꽃을 마음껏 눈에 담아오려 합니다. 공항에 한 시간 일찍 도착한 덕분에 이렇게 글을 읽고 쓰는 여유를 누리니 참 좋습니다.

​오후 1시 30분, 제주에 도착하면 25일 동안 홀로 차박을 한 남편이 마중을 나올 것입니다. 추운 날씨에 밖에서 고생했을 남편이 더 애틋할까요, 아니면 집에서 아이들 뒷바라지한 제 수고가 더 컸을까요? 아마 공항에서 마주치는 순간, 서로의 얼굴에 담긴 세월과 미소를 보며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기내에 이륙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흐릅니다. 자리에 앉자마자 기분 좋은 나른함이 쏟아지지만, 이 순간만큼은 놓칠 수 없습니다. 비행기가 활주로를 전력 질주하며 거친 숨을 몰아쉬는 그 '찰나의 마법'이 좋으니까요.
​억지로 눈을 뜨고 온몸으로 진동을 느낍니다. 날개가 파르르 떨리며 엔진이 거대한 굉음을 토해내는 순간, 수평으로 내달리던 기체가 휘청하며 기수를 하늘로 치켜듭니다. 중력의 묵직한 손길이 몸을 시트에 밀착시키는가 싶더니, 어느새 땅은 까마득한 발밑으로 멀어집니다.
​잠시 감았던 눈을 뜨니, 창밖은 이미 다른 세상입니다.
​발밑에 펼쳐진 구름은 더 이상 지상에서 보던 평면적인 그림이 아닙니다. 마치 솜털을 뭉쳐놓은 듯 몽글몽글한 3D 조각품들이 끝없이 펼쳐져 있습니다.
​가족의 형상: 옹기종기 모여 누워있는 다정한 모습
​구름 산맥: 하얗게 눈이 덮인 험준한 봉우리들
​영웅의 비행: 아기를 품에 안고 비행하는 슈퍼맨까지
​햇살을 가릴 것 하나 없는 해발 수만 피트 상공, 구름 위는 눈이 시릴 만큼 쨍쨍한 빛으로 가득합니다.
​비행기가 고도를 낮추며 다시 구름 속으로 몸을 밀어 넣습니다. 아까 보았던 그 환상적인 조각들은 온데간데없고, 창밖은 그저 축축한 물방울들이 흩날리는 무채색 안개뿐입니다. 화려한 무대 뒤편의 텅 빈 복도처럼, 지상에서 보던 익숙하고 밋밋한 풍경으로 돌아오는 시간입니다.

​하늘을 비행한 시간은 고작 30분 남짓이었을까요? 이륙과 착륙 시간을 모두 합쳐 한 시간 만에 드디어 제주에 도착했습니다. 마중 나오기로 했던 남편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평소라면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제가 게이트를 나오자마자 손을 흔들어주던 사람인데 말이죠.

​전화를 해보니 1시 50분쯤 도착한다기에 1번 게이트 앞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주차비를 아끼려고 밖에서 기다리나 보다' 생각하며 지나가는 차들을 유심히 살폈습니다. 누군가를 태우는 승용차, 단체 관광객을 실어 나르는 미니버스, 승객을 내려주는 버스와 택시들 사이로 우리 차와 번호가 비슷한 스타렉스 한 대가 지나갑니다. 반가운 마음에 손을 흔들었지만 그냥 지나쳐 버리더군요. 자세히 보니 우리 차는 윈도우 밴인데, 그 차는 일반 밴이었습니다.

​어느덧 약속한 시긴이 넘었습니다. '2시가 넘었는데도. 차는 보이지 않습니다. 부산과 비행기에서는 뜨거웠던 날히였는데. 찬바람이 바지단에서 종아리로 파고. 듭니다.. 차가 밀리나?' 걱정하던 찰나 전화가 왔습니다. 이미 1번 게이트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겁니다. 차를 세울 필요가 없었나 의아해하고 있는데, 저 멀리서 남편이 걸어오는 게 보였습니다. 걱정과 달리 생각보다 말끔한 모습입니다. 제주에서 차박을 시작한 지 벌써 한 달째라 행색이 초라하진 않을까 내심 걱정했는데, 어제 목욕탕에 다녀왔다며 활짝 웃네요.

​남편은 이번 여행의 주제를 '제주 시민처럼 살기'로 정했다고 합니다. 차는 성산에 세워두고 무려 1시간 30분 동안 101번 버스를 타고 공항까지 왔다네요. 정말 제주 도민이 다 된 것 같습니다. 1번 게이트를 나서는데 마침 성산으로 향하는 111번 버스가 대기 중입니다. 서둘러 달려가 올라탔습니다. 버스는 중산간 도로를 거쳐 성산으로 향합니다.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했던 터라 허기가 몰려왔습니다. 차에 도착하자마자 남편을 데리고 편의점으로 향했습니다. 요즘 우리나라 편의점 도시락이 정말 잘 나온다더니, 딱 하나 남은 도시락을 운 좋게 집어 들었습니다. 3,900원이라는 착한 가격에 고기 반찬, 김치, 감자볶음까지 구성이 아주 알찹니다. 가격 대비 맛도 훌륭한 '가성비' 최고의 식사였습니다.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치고 차 안에서 따뜻한 커피 한 잔을 곁들였습니다. 오후가 되니 공기가 제법 쌀쌀해집니다. 동지가 지나 해가 아주 조금 길어졌다지만, 제주의 겨울바람은 여전히 매섭네요. 오늘 하루, 긴 기다림과 반가운 재회의 일과는 여기서 마침표를 찍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