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를 떠나 바퀴 달린 집으로 삶의 터전을 옮기기로 했다. 이제부터 10년 동안 세상을 누빌 나의 안식처다. 그 거창한 여정의 첫걸음은 바로 남편이 각목으로 얼기설기 만든 '자작 침상'으로부터의 화려한 탈출이다.
침상 매매 약속은 12시였지만, 아침 9시부터 서둘러 화명생태공원으로 향했다. 짐을 빼보니 가관이었다. 3년은 버틸 법한 핫팩 200개, 라면 30봉, 쌀 한 포대, 그리고 빨래하기 귀찮다고 박스째 사놓은 양말 50켤레까지 쏟아져 나왔다. 짐더미를 구경하던 행인의 눈길이 따가웠지만 상관없었다. 이건 난민촌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위한 비움의 의식이었으니까.
기존 침상의 민낯을 마주한 순간 기가 막혔다. 남편 쪽은 반듯한데, 내 머리 쪽 각목만 비스듬하게 하강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내 머릿속에 든 지식이 너무 무거워 가라앉은 것일까, 아니면 남편의 지능적인 설계였을까. 제주도 차박 때 나만 피가 거꾸로 쏠려 박쥐처럼 잠을 설치던 이유가 드디어 밝혀진 셈이다.
당근마켓에서 65만 원짜리 침상을 '경로 할인' 신공까지 발휘해 33만 원에 득템했다. 새로 들인 침상은 반듯한 수납칸이 6개나 되어 공간이 훨씬 넉넉했다. 예전처럼 짐 하나 찾으려고 유물 발굴을 할 필요도 없다. 산더미 같던 짐과 침낭까지 수납함 속으로 쏙 들어갔다.
나를 사랑하는 일은 남편의 투박한 정성과 자존심을 무조건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나의 편안한 잠자리를 먼저 챙기는 것이다. 그리고 좀 더 예쁘고 편리한 공간을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제는 남편의 정성 대신 '비움의 철학'을 적용하기로 했다. 물건은 더 이상 채우지 말자. 공간이 비어야 비로소 내 마음의 수평도 맞는다.
침상 하나 바꿨을 뿐인데 차 안이 깨끗해져서 마음까지 환하다. 10년 여정의 시작이 좋다. 내일은 바퀴 달린 내 집의 내부를 더 꼼꼼히 정비해 볼 생각이다. 여보, 미안하지만 당신의 각목 침상은 이제 안녕이야. 나는 이제 수평의 천국에서 꿀잠 자러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