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배본능이 되살아나다.

나를 기쁘게 하는 것들

by 성희

​우리는 곧 집을 떠난다. 이번 여정의 종착지는 아파트가 아닌 스타렉스 한 대.

딸에게 집을 물려주고 떠나면서, 나는 한 가지 단단한 결심을 했다. 내 물건은 단 하나도 남겨두지 않고 흔적 없이 비워주겠노라고. 그것이 홀로서기를 시작하는 딸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깨끗하고 넓은 사랑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직접 짠 침상 아래 수납함과 벽면을 가득 채운 전면장.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설계된 스타렉스의 좁은 공간에 내 삶을 통째로 압축해 넣어야 했다. 비움은 선택이 아닌 생존이었고, 딸을 향한 배려였다. 그렇게 나는 매일 경건한 마음으로 물건들을 솎아내며 '완벽한 비움'을 완성해 가는 중이었다.

​그런데 내 철저한 결심을 한순간에 무너뜨린 복병이 나타났다. 냉장고 구석에서 발견된, 눈치 없이 싹을 틔운 마늘 몇 알이었다.


​연두색 싹을 마주한 순간, 내 마음은 겹겹의 시간을 지나 과거의 고흥으로 달아났다. 원래대로라면 이 녀석들은 고흥의 텃밭 한구석에 심겼을 터였다. 남도의 다정한 겨울 햇살 아래서 대지의 기운을 들이키며, 알싸하고 단단하게 여물었을 마늘들. 그 흙내음 가득한 생명력의 기억이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안 돼, 내 흔적은 남기지 않기로 했잖아!" 이성은 외쳤지만, 몸은 이미 본능에 응답하고 있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내 앞에는 커다란 재배 상자가 놓여 있었고, 시장에서 데려온 두메부추와 파슬리, 애플민트가 방긋 웃고 있었다.

​딸을 위해 비워낸 빈 공간 한편에, 나는 다시 흙을 채우기 시작했다. 애플민트와 파슬리를 정성스레 심고, 가장자리에는 요리하다 남은 대파 뿌리들을 조르르 심었다. 자라서 먹거리가 되어주면 금상첨화겠지만, 꼭 그렇지 않아도 상관없다. 흙을 뚫고 올라오는 저 여린 기척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내 영혼은 이미 충분히 힐링받고 있으니까.

​문득 걱정이 앞선다. 우리가 스타렉스를 타고 떠나고 나면, 홀로 남겨질 바쁜 딸이 이 식물들에게 물이나 제때 줄 수 있을까? 고민 끝에 머리를 굴려본다. 페트병에 아주 작은 구멍을 뚫어 한 달에 한 번만 물을 채워도 되는 **'자급자족 자동 급수기'**를 만들 작정이다. 내가 없는 동안에도 이 초록들이 무사히 살아남길 바라는 마음, 그건 어쩌면 내 물건은 다 치웠을지언정 사랑만은 남겨두고 싶은 부모의 수줍은 안부일지도 모른다.

​베란다 문을 열면 혹독한 겨울 추위가 훅하고 몸을 감싸 안는다. 옷깃을 여미게 만드는 모진 바람 속에서도, 저 어린싹들은 기죽지 않고 꼿꼿하게 겨울을 견뎌내고 있다. 그 강인한 생명력을 보고 있으면 이상하게 가슴이 두근거린다.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모든 것을 버리는 완벽한 무소유가 아니다. 내 가슴을 춤추게 하는 '재배 본능' 하나쯤은 품어줄 자리를 남겨두는 여유다. 고흥의 기억을 지나 현재의 베란다에 정착했다. 몇달 후 내가 없는 집안에서 뜬튼하게 자라 딸에게 몇가지 먹거리를 대어 주기를 기대한다.


​비울수록 더 선명하게 차오르는 나의 본능. 오늘도 나는 쑥쑥 자라나는 연둣빛 생명들을 보며, 길 위에서 피어날 내일을 꿈꾼다. 이 기쁨이, 오늘도 나를 춤추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