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으로 비우고, 놀이로 채우다.

캠핑카와 함께 산 하루

by 성희

비워낸 자리마다 차오르는, 나를 향한 다정한 마음


​새벽 6시, 세상이 채 깨기 전부터 나의 하루는 시작된다. 아이들의 도시락을 싸고 아침 식사를 차려 기분 좋게 배웅하는 일. 누군가는 고된 가사 노동이라 말할지 모르지만, 사랑하는 이들의 하루를 여는 이 분주함은 나를 지탱하는 기분 좋은 책임감이자 자부심이다.
​폭풍 같은 아침 시간이 지나고, 남편과 함께 베란다로 향했다. 내일모레로 예정된 페인트칠을 위해 공간을 비워야 했기 때문이다. 창고 문을 열자 2구 버너, 샤워텐트, 보온밥통 등 한때 우리의 낭만을 책임졌던 물건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제는 쓰지 않지만 선뜻 버리지 못했던 삶의 부채들. 그중 상태가 좋은 나무판자들을 당근마켓에 나눔으로 올렸다. 어제 캠핑카 침상을 교체하면서 나온 것들이다.
​글을 올린 지 단 2분 만에 알람이 울렸고, 한 시간 만에 물건은 새로운 주인을 찾아 떠났다. 나에게는 처치 곤란이었던 짐이 누군가에게는 간절히 찾던 재료가 되는 마법. 비워낸 것은 물건만이 아니었다. 아까워하던 미련을 덜어내자, 그 자리에는 '나눌 줄 아는 사람'이라는 넉넉한 자아상이 차올랐다.
​점심을 먹고 향한 곳은 우리의 또 다른 안식처, 캠핑카다. 한때 도배사였던 남편이 발라준 벽지는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누렇게 변해 있었다. 오늘의 놀이는 이 낡은 벽면을 보수하는 것. 들뜬 곳에 실리콘을 쏘고, 이동식 테이블에 다리를 다는 밑작업을 시작했다.
​마침 전동드라이버가 보이지 않아 일일이 손으로 나사를 박아야 했다. 땀방울이 맺히고 손목이 시큰거렸지만 이상하게 마음은 가벼웠다. 에디슨은 "나는 평생 단 하루도 일을 해본 적이 없다. 그것은 모두 놀이였다"라고 했다. 나 역시 그랬다. 남이 시켜서 하는 일이었다면 벌써 내던졌을 이 수고로움이, '내가 머물 공간'을 위한 일이라 생각하니 달콤한 유희처럼 느껴졌다.
​나를 사랑한다는 건 단순히 편히 쉬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고, 그 즐거움을 위해 기꺼이 땀 흘리는 시간이야말로 가장 극진한 자기 사랑이다.
​오전에 베란다를 비우며 '비움의 홀가분함'을 배웠다면, 오후에 캠핑카를 매만지며 '채움의 단단함'을 배웠다. 인생도 이처럼 낡은 것을 기꺼이 보내고, 그 빈자리를 새로운 설렘으로 채워가는 과정이 아닐까.
​이제 텅 빈 베란다와 보수를 마친 캠핑카에는 내일의 색깔이 입혀질 준비가 끝났다. 물건을 비워낸 자리마다, 그리고 정성껏 나사를 조인 자리마다 나를 향한 다정한 마음이 차오른다.
​"오늘 참 잘 놀았다. 나를 위해 기꺼이 땀 흘린, 참 멋진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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