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틀: 87세 노모가 남긴 마지막 실매듭
우리 집 거실 한편에는 조금 특별한 콘솔이 하나 있습니다. 60여 년 전, 경남의 한 시골 마을에서 온 가족의 생계를 잇고 자식들의 자부심을 지어내던 어머니의 ‘재봉틀’ 다리를 받침 삼아 만든 물건이지요. 견고한 무쇠 다리에는 '다이얼'이라는 로고가 선명하고, 세월이 무색하게도 발판을 구르면 지금도 경쾌하게 앞뒤로 몸을 흔듭니다.
어린 시절, 우리는 그것을 그저 **'틀'**이라 불렀습니다. 그 앞에 앉아 은빛 바늘을 맞추던 어머니의 신명 나는 뒷모습은 제 기억 속에서 가장 활기찬 풍경이었습니다. 어머니의 발끝에서 시작된 리듬은 우리 자매의 해진 옷가지를 메우고, 때로는 가난한 시골 마을 아이들의 꿈까지 촘촘히 기워내던 사랑의 노래였습니다.
지난주, 하동에 계신 87세의 노모를 뵙고 왔습니다. 평생 '틀' 앞을 지키며 사신 어머니는 이제야 빛바랜 기억의 실타래를 하나둘 풀어놓으셨습니다. 어린 시절, 학교에 가기 싫어 요리조리 숨어 다니던 철부지 소녀는 결국 글자를 깨치지 못한 채 평생을 살았습니다. "그때 학교에 갔더라면..." 하시는 어머니의 혼잣말에는 배우지 못한 설움과 지나온 나날들에 대한 뒤늦은 후회가 짙게 배어 있었습니다.
결혼 후, 어머니에게도 간절히 갖고 싶은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 '틀'이었습니다. 가난한 살림에 감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던 그 마음을 알아주신 건 시아버지, 즉 저의 할아버지였습니다. 할아버지는 아끼던 벼 몇 섬을 선뜻 팔아 며느리에게 미싱 한 대를 사주셨습니다. 어머니에게 그 미싱은 단순한 기계가 아니라, 세상으로 나가는 유일한 통로이자 자부심이었습니다.
손재주가 유독 좋으셨던 어머니는 그 틀로 우리 자매의 옷을 지어 입혔고, 이웃들의 옷감을 받아 돈을 벌며 살림을 일궈내셨습니다. 운동회 날이면 번듯한 체육복을 사입을 곳ㅇ 없었던 시골마을 검정팬티에 흰 러닝셔츠가 공식체육복이었습니다. 언니와 나 그리고 남동생들, 우리를 위해 밤새 '틀'을 돌려 검정 바지에 하얀 러닝셔츠를 만들어주셨고, 빨간 치마를 휘날리며 무용을 하던 날에는 마을에서 가장 맵시 나는 옷을 지어 우리를 주인공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만약 어머니가 다른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화려한 런웨이를 수놓는 '디자이너'로 살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제 마음을 스칩니다.
중학교 입학식 날, 어머니가 직접 지어주신 교복은 양장점 옷보다 조금은 투박했습니다. 특히 결이 맞지 않아 빳빳하게 겉돌던 '바이어스 실넥타이'는 사춘기 소녀였던 제 마음을 어렵게 만들기도 했지요. 하지만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거울 앞에서 낑낑대던 딸의 목 뒤로, 어머니가 심어두고자 했던 건 세상 풍파에도 쉽게 풀리지 않을 단단한 사랑의 매듭이었다는 것을요.
어머니의 손길은 미싱에서 베틀로도 이어졌습니다. 직접 짜신 삼베로 언니와 제게 정갈한 윗도리를 지어주셨고, 훗날 태어난 외손주들에게도 그 시원한 삼베옷을 입혀주셨습니다. 그 옷을 입고 해맑게 웃던 제 딸아이가 어느덧 자라 이제 한 남자의 아내가 되려 합니다.
이제 저는 이 소중한 '틀'을 생활사 박물관으로 보내려 합니다. 딸아이의 결혼을 앞두고 32평 아파트 대신 한 평 남짓한 **'캠핑카'**로의 이사를 선택하며 내린 결단입니다. 짐을 비우는 것은 단순히 물건을 버리는 일이 아니라, 내 삶의 무게중심을 '소유'에서 '자유'로 옮기는 의식입니다. 좁은 캠핑카 안에서 묵직한 콘솔을 지키느라 정작 '지금의 나'를 좁게 만들고 싶지 않았습니다.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과거의 그림자를 박물관이라는 적절한 예우의 장소로 보내주는 용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비워진 거실을 바라보며 깨닫습니다. 어머니가 미싱 발판을 구려 가족을 지켜내셨듯, 저 또한 이제 캠핑카의 바퀴를 굴려 저만의 문장을 써 내려가려 합니다.
어머니의 못다 핀 디자이너의 꿈은 제 글 속에 꽃 피우고, 저는 가장 가벼운 몸으로 '나'라는 사람을 만나러 떠납니다. 65세, 이제야 비로소 짐을 꾸리는 법이 아니라 짐을 푸는 법을 배우며, 저는 저를 지극히 사랑하기로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