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까지 좋은 사람들과 신용을 지키며 살 수 있었는데 어느 날, 딸에게 추억 어린 책상을 리폼해서 주고 싶다는 욕심이 만든 이야기입니다.
과한 욕심은 화를 부른다는 교훈을 얻었습니다.
욕심을 버리는 것이 나를 사랑하는 길이다.
그 이야기 시작해 볼게요.
웜화이트의 정적 속에 마주한 낡은 기억
요즘 우리 집은 온통 어수선하다. 짐이 가득 찬 상태에서 감행한 셀프 리모델링, 벽지 위에 '웜화이트' 페인트를 덧칠하며 좁은 집을 넓어 보이게 만드는 마법을 부리는 중이다. 거실과 베란다를 겨우 끝내고 이제 딸이 쓰는 큰방으로 들어섰다. 그곳엔 새하얀 벽지와는 대조되는 커다랗고 낡은 책상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가로 180cm, 세로 70cm의 압도적인 크기. 상판은 여기저기 찍히고 긁혔으며, 오른쪽 서랍 하나는 아예 비어 있어 기우뚱해 보이는 이 가구는 우리 가족의 가장 시리고 추웠던 시절의 유산이다.
스타렉스에 실려 온 눈물과 아버지의 책상
딸은 우리 식구의 희망이었다. 서울에서 공부시키고, 미국 교환학생에 독일 유학까지 보내며 당당하게 키워낸 자부심이었다.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며 홀로 독립했던 딸이 실직 후 다시 직장을 구하지 못해 짐을 쌌을 때, 남편은 말없이 스타렉스를 몰고 서울로 향했다.
딸의 이삿짐을 싣고 돌아온 날, 우리는 속으로 피눈물을 삼켰다. 퇴근해 보니 남편은 딸에게 화장실이 딸린 큰방을 내주었다. 가족과 부딪히지 않고 편히 공부하라는 무뚝뚝한 배려였다. 며칠 뒤, 묵직한 고가구 느낌의 책상 하나가 들어왔다. 새 책상도 살 수 있는 15만 원을 주고 굳이 서랍 하나가 빠진 중고를 사 온 남편. 그것은 비록 상처 입고 돌아왔을지라도 우리 딸의 존재가 이 고가구처럼 깊고 귀하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싶은 아버지의 사랑이었다.
견본 서랍을 품에 안고 시작된 설렘
딸은 그 서랍 비어 있는 책상에 앉아 다시 일어섰고, 마침내 공무원 합격이라는 소식을 들고 환하게 웃었다. 이제 결혼을 앞둔 딸을 위해, 나는 십수 년간 비어 있던 그 결핍의 자리를 채워주기로 결심했다. 처음에는 화이트로 칠해버릴 생각이었으나, 공방 사장의 "서랍 하나 5만 원, 전체 복원 20만 원"이라는 제안에 마음이 바뀌었다.
"이거 최고급 호두나무(월넛)네요. 98% 새 책상으로 만들어드릴게요."
그 말에 가슴이 뛰었다. 호두나무라면 몇백만 원은 할 텐데, 그 비용은 전혀 아깝지 않았다. 딸과 남편과 의논 끝에 선금 10만 원을 건넸다. 온전한 왼쪽 서랍을 견본 삼아 소중히 품에 안고 공방으로 향하던 길, 내 마음은 이미 우아하게 복원될 고가구의 빛깔로 가득했다.
드러난 민낯과 지질한 현실
하지만 약속은 신기루였다. 칠이 벗겨진 자국 사이로 드러난 속살은 호두나무가 아닌 연약한 가문비나무였다. 사장은 약속을 어기기 일쑤였고, 기계 하나 없는 공방은 텅 빈 공실이었다. 영수증 하나 없이 무통장 입금만 한 상황에서 견본으로 맡긴 왼쪽 서랍마저 사라질까 봐 가슴이 타들어 갔다.
연금 생활자의 넉넉지 않은 주머니에서 나간 15만 원. 가슴이 쓰라렸지만, 나는 결단을 내렸다. "다른 건 다 포기할 테니 서랍과 페인트만 주십시오." 적반하장으로 화를 내는 그와 마주하며, 결국 금곡동 그의 아파트 앞까지 찾아가 칠도 마르지 않은 서랍과 페인트 통을 빼앗듯 받아내야 했다.
어긋난 밀리미터, 그리고 투박한 구원
집에 돌아오자마자 가장 먼저 서랍부터 밀어 넣어 보았다. 하지만 들어가지 않았다. 견본까지 맡겼건만, 단 몇 밀리미터의 무심한 오차가 벽이 되어 나를 가로막았다. 15만 원이라는 인생의 매운 수업료를 치르고 얻어낸 것이 고작 이토록 맞지 않는 나무 상자라니. 허탈함에 주저앉고 싶었다.
하지만 이번엔 남편이 나섰다. 무딘 나무를 대패질하듯 갈아내고, 뻑뻑한 틈새를 억지로 벌려 서랍을 밀어 넣었다. 제대로 된 도구가 없어 박아 넣은 투박한 나사못(피스) 자국이 흉물스러웠지만, 나는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나는 붓을 들었다. 사장이 들고 온 밝은 가문비나무 서랍 위에 짙은 월넛 스테인을 한 번, 두 번, 세 번 덧칠했다. 그러자 기적이 일어났다. 연약했던 나무가 깊고 고아한 호두나무의 빛깔을 입으며 당당한 자태를 드러낸 것이다.
마침표: 가문비나무에 핀 호두나무 꽃
리모델링을 마친 환한 딸의 방 한가운데, 짙은 밤색의 품격 있는 책상이 묵직하게 자리를 잡았다. 지질한 현실과 수모를 견디며 지켜낸 이 서랍은, 이제 더 이상 결핍의 상징이 아니다.
오는 12월, 하얀 드레스를 입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딸에게 "너의 자리는 이제 비어있지 않단다"라고 말해줄 수 있는 우리 가족의 가장 완벽한 유산이 되었다. 텅 빈 방, 하얀 벽지를 배경으로 서 있는 이 책상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벅차오른다. 서랍 하나를 되찾기 위해 헤맸던 그 험난한 여정은 결국, 딸에게 '온전한 세상'을 주고 싶었던 엄마의 마지막 고집이자 사랑이었다. 지질한 현실을 이겨내고 피워낸 호두나무 꽃, 그것은 우리 가족이 서로에게 건네는 가장 따뜻한 고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