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경속의 나를 안아주다.

캠핑카 벽화를 직접 그리다

by 성희


​[나를 사랑하는 일] 만화경 속의 나를 안아주다, 그리고 다시 시작하다


​치솟는 유가 앞에 주유기 숫자가 11만 원을 찍는 순간, 가슴 한구석이 덜컥 내려앉았다. 2년 뒤면 경로우대를 받는다는 나이건만, 여전히 현실의 숫자 앞에서는 작아지는 나를 발견한다. 하지만 이 묵직한 압박은 역설적으로 내 여행의 나침반을 '먼 곳'이 아닌 '내 안'으로 돌려놓았다. 그렇게 닿은 울산 태화강 동굴피아에서 나는 뜻밖의 나를 마주했다.




​제4동굴의 거대한 만화경 속, 푸른 빛의 물고기 떼가 유영하는 한복판에 분홍색 외투를 입은 내가 서 있었다. 거울이 빚어낸 무한한 공간 속에서 나는 수십 명의 ‘홍길동’이 되어 흩어졌다 모였다를 반복했다. 그곳에서 나는 생전 처음으로 나의 ‘뒷모습’을 선명히 보았다. 앞만 보고 달려오느라 미처 살피지 못한 나의 뒤안길, 63세라는 세월이 굽이굽이 새겨진 나의 등이 그곳에 있었다.

​그 뒷모습은 생각보다 단단했고, 생각보다 애처로웠으며, 무엇보다 충분히 아름다웠다.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어쩌면 화려한 앞모습을 가꾸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았던 나의 고단한 등을 가만히 쓸어내려 주는 일이 아닐까. 나는 만화경 속 수많은 나를 향해 처음으로 환하게 웃어주었다.



​이제 나는 2개월 후, 안락한 집을 떠나 캠핑카에서의 노매드 생활이라는 무모한 도전을 시작한다. 3밴 화물차를 직접 구조 변경하며 천장 엠보싱을 붙이고 벽면을 도배했다. 그리고 지금은 차 내부 기둥에 지리산 고사목과 설악산 공룡능선을 벽화로 그려 넣고 있다. 산을 너무 크게 그려 원근감은 떨어지지만, 그것은 내가 나의 세월을 완등했음을 스스로에게 수여하는 훈장이다.

​추위와 장마, 예기치 못한 통증이 길 위에서 나를 기다리겠지만 더는 두렵지 않다. 어린 시절, 독한 쐐기에 쏘이면서도 대숲의 청량한 바람을 포기하지 않았던 그 아이가 내 안에 여전히 살고 있기 때문이다.



​나를 사랑하는 일은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내 손으로 직접 엠보싱을 붙인 좁은 캠핑카 안에서, 남편이 타준 천 원짜리 카페라떼 한 잔에 행복해하는 것. 그리고 내 삶의 기둥에 나만의 공룡능선을 꿋꿋이 그려 나가는 것. 11만 원의 연료비보다 더 뜨거운 '자존'이라는 연료가 내 안에서 타오르고 있으니, 나의 노매드 인생은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