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벗의 모친상에 다녀와서

예의, 인간다움의 최솟값

by 온돌향

화요일 밤에 부고가 도착했다.

친우 A의 어머니께서 소천하셨다고 한다.

40년 넘게 인연을 이어 온 A는 이로써 고아가 되었다.


A는 벗들 사이에서 효자로 존경을 받아 온 인물이다.

일찍이 홀로 되신 어머님을 모시느라 나이 오십이 넘도록 장가도 안 가고,

코로나 때 직장을 잃은 후엔 배달 라이더로 일하며

어머니의 항암 치료비를 마련하며 극진히 어머니를 돌봤다.


지난 5월 스승의 날에 국민학교 시절 은사님을 모시고 술잔을 거우를 때

소란스런 고깃집에서 서로 킬킬대며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다가

그 녀석이 문득 흘린 한마디 말에 취기가 싹 가셨던 기억이 난다.


"내 소원은 말야, 어머니보다 딱 하루만 더 사는 거야."


A의 어머니는 10년 넘게 암과 함께 지내 오셨고, 엊그제 비로소 암에서 자유로워지셨다.


부고를 받았다는 말을 듣고 나의 옆지기는

"이런 말이 불경스러운 거 알지만요, A씨 어머니가 돌아가신 건 슬프지만 A씨가 이제 좀 자유롭게 살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도 그랬다. 이제 A가 자기 삶을 살 수 있기를.


다음 날 문상을 갔다.

A와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데 A가 물었다.

"야, 너 어디로 배달갈 때가 제일 힘든 줄 아냐?"

"글쎄... 어딘데?"

"학교야. 학교. 꼭 젊은 여선생들이 배달을 시키면 교무실까지 가져다 달라고 해. 너네 학교도 그러냐?"


요즘은 학교 안으로 들어가려면 절차가 여간 번거롭지 않다.

학부모님들은 학교 누리집을 통해 미리 온라인으로 신청해 승인을 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교무실의 확인 절차를 거쳐서 학교 안전지킴이 선생님에게 신분증을 맡기고 출입증을 패용한 다음 학교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런데 그 절차를 밟으려면 콜을 한두 개 놓칠 수가 있다.

아파트 경비원분들이 그러하듯이 학교 안전지킴이 선생님들도 배달 라이더를 하대하는 일이 다반사여서 거기서 오는 열패감도 A를 난처하게 만든다고. 그리고 교사나 학생들로 왁자지껄한 복도와 계단을 거쳐 교무실까지 가는 것도 본인에게는 곤욕스러운 일이라고 했다. 왜 안 그렇겠는가.


주문한 교사가 교문까지 나가서 음식을 받아 오면 된다.

그 정도의 예의도 지키지 않는다면 어떻게 자신의 인간다움을 지킬 수 있을 것인가.

하물며 어떻게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을 것인가.


'너네 학교도 그러냐?'


내가 일하는 학교에서 그런 교사는 없는 걸로 알고 있다.

그러나 배달 음식은 거의 날마다 시켜 먹는다.

젊은 여교사들이 특히 그러하다.

배달 음식이 도착하는 동안 사발면을 익히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들은 교문까지 나가서 음식을 받아온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다만 내가 있는 학교의 학생들은 배달 음식을 시켜 먹을 수 없다. 사발면도 금지다.

그랬다가는 벌점이 나간다. 교칙이 그러하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배달 음식과 사발면을 먹지 못한다면 나도 학교에서는 배달 음식과 사발면을 먹을 수 없다.

그게 아이들에 대한 예의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나의 옮음을 타인에게 강요할 수는 없으니 그것을 두고 뭐라 하고 싶지는 않다.


문제는 먹고 난 이후다.

학교에서 배달 음식을 시켜 먹은 교사들은 몇 숟갈의 밥과 반찬, 얼마간의 양념이 남아 있는 배달 음식 용기를 교무실 쓰레기통에 그대로 버린다.

그런데 내가 있는 학교는 시대착오적이게도 교무실 청소를 학생들에게 맡긴다.

그 아이들이 선생님들이 쓰는 쓰레기통에서 잔반이 적잖이 남아 있는 냄새 나는 배달 음식 용기를 보면 무슨 생각을 할까.

이건 아이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젊은 교사들에게 그러면 안 된다고 말하고 싶지만 요즘 그런 잔소리를 하면 '불편한 사람'으로 찍혀 정말 불편한 학교 생활이 시작된다.

그래서 오후에 공강 시간이 있으면 내가 몰래 가져다 버리곤 했다. 그것이 젊은 동료 교사들에 대한 예의를 지키면서 아이들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길이었다.


내 이야기를 들은 A는 연거푸 소주 두 잔을 들이켜더니

"허, 참.."

끌탕을 했다.


예의는 자신에게 좋고 편안한 사람에게만 베푸는 것이 아니다.

무언가를 참으면서 노력을 해야 실천할 수 있는 대단한 일도 아니다.

예의는 자신이 금수가 아닌 인간임을 증명하기 위해 실천해야 하는 최소 행위이다.

고관대작이든 가난뱅이든 가족이든 남이든 나와 친한 사람이든 소원한 사람이든

그 대상이 사람이라면 마땅히 그에게 보여 주어야 할 인간다움의 최솟값이다.

예의가 갖춰져야 그다음에 배려, 선의, 희생, 헌신과 같은 고귀한 삶도 비로소 가능해지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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