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온을 찾은 작은 변화
샤워를 마친 뒤, 늘 그랬듯 젖은 수건을 허리에 두르고 거실을 지나 방으로 들어가곤 했다. 그게 내 일상의 한 장면처럼 자연스러운 습관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눈에 띈 랩스커트를 호기심에 한번 둘러봤다. 남자라서 조금 어색했지만, 막상 입어보니 생각보다 훨씬 편안했다. 수건처럼 축축하게 흘러내리지도 않고, 허리에 안정감 있게 감겼다.
그 상태로 방 안에 들어와 옷을 갈아입는데, 몸이 한결 가벼웠다. 축축한 수건을 오래 두르지 않으니 습진 걱정도 덜할 것 같았다.
별것 아닌 작은 변화였지만, 그 안에서 느껴지는 편안함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남자라서 조금 어색하다'고 느꼈던 마음도 금세 사라졌다. 편한 게 좋은 건,
성별과 상관없는 일이니까.
편안함은, 몸뿐 아니라 마음에도 찾아왔다. 방 안에 들어와 유튜브로 잠자는 음악을 틀어놓자, 잔잔한 멜로디가 몸을 감싼 랩스커트처럼 마음을 안정감 있게 다독이는 듯했다.
오래된 기억들이 스쳐 지나갔지만, 생각이 많아지려는 밤이 되지 않도록 눈을 감고 누워 어두운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작은 변화가 가져다준 평온 덕분인지 마치 우주 한가운데에 떠 있는 듯한 가볍고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며칠 전 비 오는 날, 고장 난 자전거를 두고 시골 버스를 탔던 일이 떠올랐다. 창밖으로 젖은 논과 밭이 빠르게 흐르고, 사람들은 각자의 세계 속에 묵묵히 있었다.
터미널에 도착하여 의료원까지 걸었다. 길을 걷다가 문예회관 앞 박세리 동상을 보고 잠시 멈춰 서 있었다.
‘끝까지 버티면, 나도 괜찮아질까.’
작게 스친 질문에 마음이 묘하게 흔들렸다. 그 모든 불안과 질문을 안고도, 나는 여전히 내 길을 걸어야 했다.
의료원 앞을 지나가던 여고생들을 보며 마스크를 높이 올리고 시선을 피했던 순간도 있었다. 우연히 만난 동창의 말 한마디가
“야, 넌 아직도 자전거 타고 다녀?
그 나이 먹도록 아직도 차도 없어?"
서늘하게 다가왔음에도, 나는 내 길을 걸어야 했다.
돌아오는 버스에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사람들은 각자의 우산 속으로 사라진다.
오늘도 겨우 버텼다.
하지만 다행이었다.
나는 아직, 나를 포기하지 않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