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 파먹기

냉파

by 진솔

여행 중에 결정했다.

쌓지 않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작고 불편하리만큼 살았던 여행이

또 한 번에 비움을 선택했다.

5년 전부터

비우기 시작했는데도

여전히 완전한 비움을 끝내지 못했다.

쌓아두는 미련함과

바꾸지 못하는 습성은

보란 듯 내 모습에 그대로 투영된다.


이제 집에 남은 높은 가구는

20년째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냉장고와 김치냉장고뿐이다.

벽장도 다 뜯어내고

눈높이에 맞추어

나지막이 옷걸이와 선반을 만드니

눈도 편하고 바람도 들었다.

싱크대도 최소한의 살림살이만 남기고

상부장은 다 떼어 버리고 나니

커다란 고래가 나는 아트월이 되었다.

이제 남은 건 그득히 먹지 않는 음식을 쟁여둔

냉장고들을 처분하는 일만 남았다.


여행을 마치고

짐을 실은 차는

냉장고를 파는 매장으로 미련 없이 직행했다.


적당한 가격으로 골라 주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냉장고가 당도하기 전

먹을 수 있는 것들은 먹어 치우자며

냉파

냉장고 파먹기를 작심했다.

묵은 김치며

젓갈

사놓고 먹지 못한 고기들

남은 식재료


하나씩 살피며

쉬는 동안 먹을 만큼 먹고 버리자니

자꾸 메뉴가 떠오른다.


어제는 삼계닭을 하나 사서

얼린 전복을 해동시키고

한편에 돌아다니던 마른 황기

냉장고에 그대로 얼려둔 통마늘을 넣고

끓인 훌륭한 복날 음식이 되었고


오늘점심엔

뒹구는 양파와 감자

냉동고에 있던 돼지고기를 넣어

소면 위에 얹으니 근사한 짜장면이 되었다.


저녁은 남은 돼지고기를

조물조물 양념해

두루치기를 해보아야겠다.


동안

음식과 물건이 쌓였던 건

시간이 없어서일까

관심이 없어서일까

마지막이라는 아쉬움에 소스를 얹어서 인지

만드는 요리에 정성이 담긴다.

가장 신선할 때 해주지 못했던 미안함도

함께 하지만

어제의 삼계탕도

오늘의 짜장면도

맛있게 먹어주는

감시함도 함께한다.


다음부터는

필요한 만큼만

가장신선할 때

만들어 주어야겠다.


이번에 냉장고만 바꾸면

사람만 빼고는 다 바뀌는 집이 된다.

여행도 다녀왔고

집도 비워내고

묵은 것도 바꾸고

새로워진 기분으로 일을 시작할 수 있을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