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 유행을 알면 어딜 가든 보이는 법이었다.
‘회원님은 헬창나시 안 입으세요?’ 내 트레이너가 물었다.
‘네?’
‘헬창나시요.’
처음 듣는 단어에 잠깐 멍했지만 금방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있었다. 헬창이란 말은 여기저기서 언뜻 접해왔었다. 누구한테 묻지 않아도 뜻을 알 수 있는 신조어였다. 헬스에 몸을 판 사람. 헬스장을 주야장천 드나드는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헬창나시란 이 사람들이 즐겨 입는 아주 가느다랗고 헐렁한 민소매 옷이었다. 안 입은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입었다고 하기도 어려운 옷인 헬창나시는 최근 헬스장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땀도 제대로 안 흡수될 거 같은데.’ 내가 말했다.
‘말리는 재미에 하는 거죠.’ 트레이너는 요즘 자주 보이기 시작하는 Spyder란 브랜드의 옷을 입고 있었다.
가끔 모르는 게 약일 때가 있다고 느낀다. 배운 것도 차라리 잊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헬창과 헬창나시를 내 어휘에서 지우고 싶었다. 그리고 이와 관련된 하위문화도 모르고 싶었다. 뭔가를 좋아하면 사람들은 커뮤니티를 형성하는 법이었다. 이제는 단어도 생소한 서클이니 동호회니 하는 모임에서부터 다음 카페나 디시갤 같은 온라인 플랫폼으로 사람들은 공동체를 이루었다. 거기 한번 속하면 그 안에서 쓰이는 언어와 통용되는 농담들을 좋은 싫든 배울 수밖에 없었다. 온라인 커뮤니티에 가담을 한 적은 없었지만 헬창이라는 단어는 어떻게든 습득이 돼버렸고 그 외에도 헬린이, 헬게이 등의 무궁무진한 파생어도 알게 되었다. ‘슬림머슬'이나 ‘근돼'등의 단어들로 자기 체형을 표현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회원님은 3대 몇 하세요?’ 처음 퍼스널 트레이닝을 시작했을 때 트레이너가 물은 말이었다.
‘네?’ 나는 또 못 알아듣고 멍청하게 물었다.
‘3대 운동이요. 총 몇 하세요? 보통 3대 300이다, 3대 500이다 하는데.’
3대 운동이란 스쾃, 데드리프트, 벤치프레스를 뜻했다. 그리고 뒤 숫자는 각 운동의 가장 무거운 중량을 합한 값이었다. 300 킬로면 헬스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었고 500 킬로면 진정한 헬창이었다. 어떤 특별한 지위에 오르는 격이었다. 당연히 인스타그램엔 해시태그와 인증 비디오가 즐비했다. 500이란 숫자가 어디서 유래하는진 모르겠지만 내 중량을 계산해 보니 턱없이 모자랐다. 거기에 특별한 뜻을 둘 생각도 없었다. 정확한 수치를 목표로 정하면 성장에 더 도움이 될 것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운동이란 게 매번 조금씩 그러나 꾸준히 밀어붙여야만 발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500을 향해서 피땀을 흘리는 사람들에겐 존경심이 들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어쩌다 정해진 숫자를 모두가 받아들이고 집착하는 게 나는 싫었다. 하루에 만보를 걸어야 한다는 미신도 일본의 만보기 회사가 만든 ‘만'이라는 숫자보다는 ‘충만함'에 뜻을 둔 상표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사람들이 모여 만들어내는 규칙들, 유행, 어휘, 진지함 등에 나는 언제나 거부감이 들었다. 헬스장마다 보이는 분홍빛 네온의 ‘너는 운동할 때가 가장 예뻐'라는 문구들, 아널드 슈워제네거의 사진과 ‘간단해요. 흔들리면 그건 지방이에요.’이라는 인용문, 캘빈 클라인 팬티를 입은 남자 트레이너들과 비키니에 하이힐을 신은 (왜??) 여자 트레이너들의 바디프로필들을 나는 더 보고 싶지 않았다. 사진을 찍으러 갈 때 스튜디오에서 캘빈 클라인 팬티와 킬힐을 소품으로 준비하는 것이 분명했다.
다 늘어진 헬스장 공용 운동복을 거부하고 자기 옷을 사 입는 것은 비교적 최근의 헬스 문화였다. 헬창들은 헐렁한 민소매에 검은 반스 스니커즈, 팔꿈치와 손목과 무릎과 배를 감싸는 보호대를 착용했고 어떤 이들은 파란색 목욕탕 수건으로 두건을 만들어 쓰는 관습도 꾸준히 유지했다. 헬스장은 한때 목욕탕이나 사우나 한편에 대강 지어진 부설 공간 따위로만 여겨졌었다. 땀을 빼고 때를 민 뒤 찜질방 옷을 입고 마사지 벨트와 러닝머신으로 조금 시간을 보내는 정도의 공간이었다. 그러나 헬스를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시설들도 많이 생기면서 헬스복도 패션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옷을 입는 것은 헬스장에 갈 동기부여가 되기도 했다. 내 옷장 서랍도 운동복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트레이너가 헬창나시를 언급하고부터는 혹시 내가 그 부류의 하나가 되진 않을까 하는 걱정으로 신중하게 운동복을 고르게 되었다. 민소매는 자주 입었지만 옷보다는 끈에 가까운 헬창나시를 입는 우는 범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하얀 양말을 바지 위에 덮어 신지도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바짓단을 덮는 하얀 양말의 스타일링은 넘어가기 쉬운 유혹이었다. 거지존이 되기 쉬운 바지와 발목이 만나는 부위를 양말로 감싸는 것은 뭔가 세련되고 날렵한 데가 있었다. 이는 레깅스를 입는 여자들에게 주로 유행했지만 최근엔 남자들도 못지않게 따르고 있었다.
유행을 한번 인지하면 가는 곳마다 보이는 법이었다. 인스타그램에서 골프를 치는 친구들의 사진을 보기 시작한 건 몇 년 전이었다. 처음엔 흔치 않은 취미를 뒀다 생각했다. 우리 나이에 골프를 친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골프 사진은 시간이 지나며 더 흔하게 보였다. 녹색의 언덕들, 카트에서 포즈를 취하는 사람들, 스윙을 하는 뒤 자세. 모두 홈쇼핑에서나 보곤 했던 골프 패션으로 단장을 한 차림이었다. 캡션은 종종 ‘오랜만에 필드 나오니 좋다'라는 요지였고 엘리베이터를 타면 ‘스크린 한번 하자'라는 사람들의 대화가 들리곤 했다. 헬스장에선 나무 막대기를 휘두르며 연습을 하는 아저씨들을 볼 수 있었고 쇼핑몰에는 발음하기 어려운 북유럽 언어의 골프 옷 가게들이 번져나갔다. 남자 마네킹은 캡, 폴로셔츠, 하얀 바지를 입었고 여자 마네킹은 털 뭉치가 달린 승마모자, 짧디짧은 짧치마, 무릎까지 올라오는 양말이 전형적이었다. 골프 패션에 아가일과 하운드투스 패턴은 팬티계의 캘빈 클라인 로고인 격이었다.
스포츠나 레저 활동을 즐기기 위해선 옷장을 다 갈아야 할 정도로 구체적인 의상을 갖춰 입으면서도 동시에 그 안의 사람들과는 복제처럼 보이고 싶은 마음은 역설적이다. 개성은 표현하고 싶지만 또 눈에는 띄기 싫다. 교복과 군복이 지겨워 내 마음대로 입고 싶은 욕구는 강해졌지만 결국 또 다른 유니폼을 찾곤 한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바사삭 거리는 등산복을 입지 않으면 산에 갈 수 없고 온몸을 덮는 래시가드를 입지 않으면 야외 수영장을 가기란 불가능해 보였다. 사람들이 쳐다보기 때문이다. 무언의 합의에서 조금이라도 다른 옷차림을 한 사람은 끊임없는 촌평과 시선에 시달리게 된다. 마치 공공장소에서 벌거벗은 나를 발견하는 꿈을 꾸는 것과 같다. 그렇게 그들 중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어쩔 땐 사라지고 싶어진다. 배경에 녹아 없어지면 편할 거 같다. 길거리나 지하철에서 나를 위아래로 쳐다보는 아저씨들, 사계절을 막론하고 ‘하이고오 춥지도 않은가 벼!’ 너스레부리는 아줌마들의 에너지가 때로는 버겁기 때문이다.
타인들의 시선 때문에 나를 바꿀 필요는 없다고 번번이 생각하면서도 그저 그 눈들이 피곤하여 유니폼을 입고 싶어질 때가 있는 건 사실이다. 내가 입고 싶은 대로 입고 싶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내가 그렇게 집착을 하는 것도 결국 남들에게 ‘나는 신경 쓰지 않는다'라는 걸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결국 내가 유니폼을 입든 입지 않든 남들을 염두에 두는 셈이다. 마치 가수들이 한결같이 ‘I don’t give a fxxx.’이라며 노래를 부르는 것과 같다. 노래를 부르는 게 스스로를 반증하는 꼴이다. 몇 날 며칠을 생각하며 노래를 만들지 않았나? 자의식이 없는 어린이들은 노래를 부르고 에세이를 쓰며 다른 사람은 신경 쓰지 않는다 세상에 선포하지 않는다. 아예 안중에 없기 때문이다. 헬창나시를 입거나 입지 않거나 나는 속으로 발악을 할 뿐이었다. 신경 쓰고 싶지 않으니까 제발 도와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