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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지훈 Mar 15. 2022

Marc Is High.

남자 친구 가족은 우리 가족만큼 드라마가 많았다.

"Marc can't come. He's in his room. He's high."

영상통화를 하는 남자 친구의 노트북에서 남자 친구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크는 남자 친구의 형이었다. 통화가 끝나고 나서 내가 물었다. “Did your mom say your brother was high?”


대마초와 전자담배를 하루 종일 피운다는 폴의 세 살 위 형의 얘기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큰아들이 취한 상태라 인사를 할 수 없다는 말을 어머니로부터 듣는 것은 신선한 일이었다. 30대 후반의 마크는 무일푼의 신분으로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었던 독립생활을 끝내고 얼마 전부터 부모님 집에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고 했다. 이들 간의 마찰은 예견된 일이었다. 그러나 팬대믹을 살아남기 위해 같은 공간에서 서로를 견뎌야 하는 게 일상이 된 세상이었다. 살아남기 위해 공존하는 법을 배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부모님들은 큰아들의 흡연을 아주 막을 수 없다는 걸 인정하고는 방안으로만 구역을 제한하는 나름의 규칙을 정한 모양이었다.


삼 남매 중 막내인 폴은 가장 책임감 있는 아들은 셈이었다. 고국을 떠나 선생님으로 일하며 스스로는 물론 동거하는 남자 친구까지 책임을 지는 어엿한 어른인 것이다. 전에는 형이나 부모님을 위해 집에 송금을 하기도 했었지만 어느 때부턴 자기 안위를 더 생각하기 시작했다. 폴의 아버지는 변호사였는데 이상한 일에 휘말려 감옥살이를 한 뒤로는 간호사 어머니가 혼자서 생계를 이어나가야 했다. 캐나다의 간호사는 다행히 고액의 연봉을 받는 직업이었지만 혼자서 감당해야 했던 책임감은 막대한 것이었다. 온 가족을 먹여 살리던 어머니는 은퇴를 앞두고 있었지만 폴의 누나가 무리하게 집을 사는 걸 도와주는 탓에 아직도 일에 묶일 수밖에 없었다. 누나가 그 돈을 갚을 때까지 말도 섞지 않겠다며 보이는 원망은 무서울 정도였다.


나는 오랜만에 우리 부모님을 만나게 되었다. 추석에 만나지 못하게 된 게 아쉽다며 서울에 올라오는 김에 나를 보고 싶다고 했다. 부모님은 연휴에 길게 여행을 갔다 왔다고 했다. 둘은 1년에 두어 차례씩 차에 살림살이를 바리바리 꾸려 우리나라 방방곡곡을 누비고 다니셨다. 바닷가에 텐트를 치고, 동네 장에서 식료품을 사 밥을 해 먹는 재미로 부모님은 노년을 보내고 싶어 하셨다.

차에서 들을 시디를 사기 위해 동묘시장에 오는 김에 나를 만나러 왔다고 했다. 요즘 시대에 시디라니 시대착오적이기가 짝이 없었지만 블루투스나 케이블로 핸드폰을 연결하는 재간이 부모님들에겐 없었다. 내가 몇 차례 블루투스 연결을 시켜주기도 했지만 버튼 하나라도 잘못 누르거나 업데이트를 하면 바로 속수무책이 돼버리는 탓에 시디가 가장 안전하고 편한 길이었다. 어렸을 때 가족과 휴가를 가면 대부분의 시간은 차 안에서 보냈던 것 같다. 뜨거운 여름 고속도로를 달리며 들었던 음악은 폐업하는 가게들에서 아버지가 쓸어 담아 산 시디들이었다. 아버지가 어떤 기준으로 음악을 정했는진 모르겠지만 아버지 취향으로 미루어 보아 우리 세대가 듣는 최신가요만 아니면 한 번쯤 들어 볼 가치가 있다고 여겼던 것 같다. 그중에서도 '한국인이 좋아하는 팝송', '명화 사운드트랙'과 같은 앨범들이 애청이 되곤 했다. 프레디 머큐리의 “Love of My Life”, 카디건스의 “Lovefools”, 리사 로브의 “Stay” 같은 노래를 들으면 나는 에어컨 없이 오직 고속도로 바람으로 더위를 식히며 차 안에 갇혀있던 여름날들을 떠올린다.

노점상에서 시디 꾸러미를 사서 가방에 넣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만났다. 동묘엔 사람이 많았다. 코로나가 한창인데 여기는 평일에도 사람들이 넘친다며 부모님은 '틀딱이들' 흉을 봤다. 틀니를 딱딱 거리며 세상이 이렇다 저렇다 성내기 좋아하고 '호국민족자유민주미래연맹'과 같은 괴 집단 활동을 하는 늙은이들을 조롱하며 부르는 소리였다.


“이 책 한번 읽어봐.”

초밥과 회로 점심을 먹은 뒤 카페로 자리를 옮겼을 때 아버지가 말했다. 창경궁 건너에 있는 한옥 건물이었는데 풀밭이 있는 뜰이 예뻤다. 직원이 캠핑 의자와 탁자를 펴고 앉을 수 있다고 해서 우리는 소풍 온 기분을 내며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아버지가 권해주는 책의 제목은 '당신의 주인은 DNA가 아니다'였다. 아버지의 말에 따르면 DNA가 사람의 인생을 결정짓는 것이 아니라 신념을 가지면 모든 걸 바꿀 수 있다는 내용의 책이었다.

“선천이냐 후천이냐 결국 그 얘기 아니에요?" 내가 말했다. "태어날 때 정해지는 것과 살면서 변화되는 것 사이의 논쟁은 하루 이틀 있었던 일도 아니고, 결국엔 언제나 두쪽이 다 영향을 미친다는 뻔한 결론 아니에요?

핸드폰으로 책을 검색해보았다. 원래 제목은 'The Biology of Belief'였는데 검색 결과에서 가장 눈에 띈 것은 표지였다. 눈을 감은 평화로운 여성의 얼굴이 있었고, 그 머리 주변으로는 역동적인 자세의 형상들이 잔잔한 물결을 일으키며 춤을 추고 있었다. 곳곳엔 고대 상형문자 같은 것들이 조악하게 들어간 게 파워포인트 클립아트 수준이었다. 목차를 보니 전반부는 과학 관련 얘기를 하다가 후반부엔 긍정적 생각으로 인생을 바꿀 수 있다는 내용이 전개됐다. 긍정적 사고가 삶을 바꾼다, 와 같은 격언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 이 세상에 있을까? 닳고 닳아 아무 의미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낡은 이 말은 '맥주는 차게 마시면 좋다'와 같은 어느 신문에서의 생활의 팁만큼 하나마나한 소리였다.

그러나 뻔한 책이란 말로 가볍게 무시하고 넘어갈 수 없었던 것은 이 긍정의 힘이란 것을 극단적으로 믿는 사람들이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시크릿'과 같은 책을 성경처럼 여기며 긍정의 힘을 거의 종교로 만든 집단은 십수 년 전부터 성행하기 시작했다. 내가 믿는 것에 따라 내 주변이 다르게 움직이고 급기야 우주까지 내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이론은 '끌어당김의 법칙' 혹은 'The Law of Attraction'과 같은 이름으로 알려졌다.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 역시 같은 맥락이었다.

긍정적인 마음으로 사는 인생이 좋다는 것엔 이견이 없었다. 하지만 양자물리학과 같은 어려운 이론을 이용하여 신비주의를 과학으로 꾸미는 게 문제였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끌어당김의 법칙으로 돈을 벌거나 병을 고칠 수도 있었다.

이와 같은 생각을 말하지 아버지는 대답했다. “네가 모른다거나 믿지 못한다고 해서 틀리다고 하는 거네? 글을 쓴다는 사람이 그렇게 생각이 닫혀있으면 안 되지.”

속이 확 뒤틀렸다. 점심을 먹으면서부터 나는 이미 마음이 조금 상해있었다. 얼마 전 시나리오 공모전에 작품을 냈다 떨어진 일로 아버지와 얘기를 했기 때문이었다. 자기가 쓴 글에 대한 비평을 듣는 것은 어마어마한 스트레스다. 실패의 좌절감을 채 추스르지 못한 상태에서 피드백을 듣는 것은 더욱 힘들었다. 아버지는 내가 얼마나 부족하고 배워야 할 게 많은지 번번이 일러주길 좋아했다. 내가 하는 노력은 아버지에겐 허사로만 보였고 자기가 말하는 방식을 그대로 따라 하지 않으니까 안 되는 거라고 했다. 아버진 내가 연극영화과에서 공부한 게 어디에 쓰이고 있냐는 말, 로버트 맥키의 책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를 제대로 공부하지 않았다는 말, 내가 하루에 글을 쓰고 책을 읽는 시간으로는 택도 없다는 말로 가장 아픈 곳을 찔렀다. 요즘 무슨 책을 읽냐는 아버지의 질문은 내 대답을 듣기보다 자기 책 읽은 얘기를 하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내가 무슨 대답을 해도 (머라이어 캐리의 자서전) 자신의 지적 호기심의 범주에 들지 않으면 곧잘 뭉툭한 답을 들었다. (그 사람 가수 아냐? 그걸 왜 읽어?)

아버지가 읽어보라는 DNA 어쩌고 하는 책은 도저히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어 단박에 이건 아니라고 물리쳤지만 아버지 입장에선 나에게 무식한 취급을 받는 것이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저자의 하버드 학위와 양자물리학 등을 운운하며 책의 진위성을 증명하려고 했다.

“책에서 양자물리학을 얘기했어요? 아버지도 양자물리학을 이해하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내가 말했다.

“어, 이 책 보고 했어.”

감정에 휩싸여 상대를 이기기 위해 무슨 말이든 하는 지경이었다. 책 한 권을 보고 양자물리학을 깨우쳤다니. 나도 모르는 학문이라 반증을 할 순 없으니 거짓말이라고 몰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아버지는 만날 때마다 이래요. 무슨 책 보고 빠지면 우리도 꼭 봐야 한다면서 권하잖아요. 그렇게 우리가 속은 게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마음수련도 그렇게 해서 빠지게 된 거였잖아요.”


수년 전 나는 부모님의 소개로 마음수련이라는 명상 단체에 들어갔었다. 나는 종교, 신, 천국, 지옥 같은 얘기는 내친 지가 오래였지만 정신적인 무언가에는 항상 관심이 많았었다. 부모님이 마음수련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한 번 해보라는 권유를 들었을 땐 큰 호기심을 가지고 수련원에 찾았었다. 공덕동 한 빌라의 두 층을 빌려 아래층은 주방, 위층은 명상실로 이뤄진 곳이었다. 부모님의 소개로 왔다는 말로 소개를 하고 젊은 여자 간부의 지도를 따라 명상을 시작하게 되었다. 눈을 감고 앉아있는 것은 보통 명상과 같았지만 가장 큰 차이점은 마음속으로 나를 죽이는 상상을 하는 것이었다. 간부의 가르침에 따르면 인간은 인생을 살며 마음속으로 ‘사진’을 찍고 그걸 누적시켜 고통을 만들어낸다고 했다. 그래서 사진을 지우고 마음속에서 자기를 죽여야 행복해질 수 있었다. 마음속으로 나를 죽이는 방법은 다양했다. 길을 가다가 심한 교통사고를 당하거나, 어떤 어마어마한 거인이 나를 짓누르는 상상, 사지가 갈가리 찢기는 상상을 하라고 했다. 그렇게 나라는 사람을 지울 때 우리는 하나의 ‘우주’가 될 수 있다고 했다. 가장 낮은 7단계에서 훈련을 마치고 나면 나는 그녀와의 문답을 통해 다음 단계로 올라갈 수 있는지 ‘확인’을 받는다고 했다. 하루에 30분에서 한 시간씩을 원룸 방에 찾아가 명상을 했다. 그러나 수련 시간이 너무 적다며 두세 시간은 해야 한다고 했다. 한 시간도 견디기 힘들었는데 그 배로 눈을 감고 앉아있으라는 건 죽음이었다. 그렇게 나를 죽이려고 했던 것이었을까?

나는 그렇게 6단계로 올랐다. 여자 간부는 ‘본원’에 가서 합숙 교육을 받아야 5단계에 올라갈 수 있다고 했다. 영 내키지가 않아서 나는 다음에 하겠다며 얼버무렸지만 그녀는 완강했다. 망설이면 늦어지기만 할 뿐이라고 했다.

"선생님, 그동안 마음 사진 많이 찍고 계셨어요?" 며칠을 쉬고 수련원에 나타나면 간부는 나에게 말하곤 했다. 하루라도 빨리 깨달음에 이르러 행복해지기를 원하지 않느냐는 말에 결국 나는 설득이 됐다. 10만 원 정도 했던 비용을 부모님이 내주었고 나는 어느 시골 마을 마음수련 본원에 찾아가 교인들과 며칠을 먹고 자며 명상을 했다. 외국에서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일어나면 밥을 먹고 큰 공실에 앉아 눈을 감고 나를 없애는 상상을 하는 걸로 하루를 보냈다. 부모님은 나보다 몇 단계가 더 높았는데 나에게 귀띔해주길 어느 단계에선 일정 시간의 노동량을 채워야 하는데 그게 가장 힘들 거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곧 마음수련에 흥미를 잃었다. 앉아서 명상을 하는 것이라면 어딜 찾아가서 돈을 내고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몇 년 후 나는 사이언톨로지를 탈출한 여자가 쓴 책을 읽게 되었고, 두 신흥종교 간의 공통점에 소름 끼칠 정도로 놀랐다. 단계를 하나씩 올라야 하는 것, 그러기 위해 상급자로부터 문답식 시험을 봐야 하는 것, 필수로 행해야 하는 육체노동, 개인의 자의식을 무너뜨려 지배하기 쉽게 만드는 것 등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정상에 오르면 세상의 부와 명성을 쉽게 거머쥘 수 있다는 약속이 한결같았다.


어머니는 희한하게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면서도 마음수련을 했다. 기독교에선 분명 이단이라고 욕할 종교였지만 어머닌 두 사이에서 나름의 교집합을 찾았었나 보다. 기독교만이 세상의 유일한 종교라고 믿을 정도로 갇힌 사람은 아니었지만 교회가 어머니 인생의 큰 부분인 것은 확실했다. 나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겨울방학 때 어머니의 강요로 교회 캠프에 참여했던 적이 있었다. 기독교 역시 수련원이란 곳들이 곳곳에 있었고 그 안에서 일주일간 찬송을 부르고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며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참아야만 했다. 목사는 우리에게 항상 통성기도를 시켰다. 우리가 무언가에 홀린 듯 자리에서 일어나 눈물 콧물을 쏟으며 주님을 외치는 열광의 도가니를 만들길 원했다. 그러나 자의식 덩어리 10대 청소년들에게 퍼포먼스를 요구하는 것은 고양이 보고 주인을 향해 꼬리를 흔들며 달려와 안기길 기대하는 것과 같았다. 미동도 없는 우리들에게 목사는 한 명씩 지목을 했고 그제야 우리는 엉거주춤 일어나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리곤 했다. 우리가 하는 기도에서 가장 잘 쓰이는 표현은 ‘머리로는 믿으나 마음으로는 믿지 못하는 저를 용서해주소서’였다. 그게 유행어처럼 번졌다. 모두가 알고 있었다. 아무리 많은 성경 구절을 읽고 설교를 들어도 마음에 와닿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십자가에서 사형을 당한 것이 왜 내 잘못이라고 하는 것일까? 부탁하지도 않은, 2천 년 전에 일어난 일을? 왜 목사는 자기가 죄인이라고 하면서 나한테도 죄인이라고 설교하는 것일까?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 꼴 아닌가?

가끔 야외에 나가 팀을 지어 활동을 하기도 했다. 대여섯 명이 무리를 지어 코스를 옮겨가며 임무를 수행하는 놀이였다. 물론 모든 게 기독교 콘셉트였다. 새 구역에 갈 때마다 우리는 응원가부터 합창해야 했다. 우리는 당근송에서 당근을 주님으로 바꿔서 불렀다. 당근송, 우유송, 숫자송 등이 인터넷 문화를 타고 들불처럼 유행하던 때였다.

'너 좋아하니? 주님! 너 사랑하니? 주님! I love you, you love me. 주님, 주님, 주님!'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일주일이 지나고 어머니가 나를 데리러 첩첩산중으로 왔다. 수련원에서 주는 점심을 먹고 가자는 어머니가 나는 답답했다. 이 끔찍한 곳에서 한 순간도 더 머무르고 싶지 않은 내 심정은 모르고 공짜 밥 얻어먹자는 여유를 부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깨닫기 시작한 것은 부모님도 세상에 대해 모르는 게 많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계속 그들의 말만 따랐다간 낭패를 보리란 것이었다. 아버지는 내게 시나리오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 해줄 말이 많았지만 자신은 지난 수십 년간 한 번도 성공을 거둔 적이 없었다. 88년에 한 공모전에서 대상을 탔고 그게 텔레비전 영화로 만들어진 것이 그가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업적이었다. 어머니는 평생을 교회와 기도로 살았지만 남들보다 더 행복하거나 불행해 보이지 않았다. 만인이 겪는 생사의 감고를 어머니도 똑같이 겪었다. 그들도 나만큼이나 인생을 몰랐고, 나만큼이나 해답을 알고 싶어 했다. 행복해지는 법, 돈 많이 버는 법, 성공하는 법, 고통에서 벗어나는 법... 그러나 아무리 책을 많이 읽어 박식하고, 아무리 밤낮을 기도와 명상으로 보냈어도 그들은 답을 찾지 못했다. 이번엔 깨달았다는 착각과 시간이 지나면 그게 아니었다고 뒤돌아보는 패턴을 반복할 뿐이었다.


어렸을 적엔 아버지의 문화적 영향력이란 절대적인 것이었다. 장래희망이라는 단어를 배웠을 때부터 나는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될 거라고 생각해왔던 것도 시나리오 작가였던 아버지 덕이 분명했다. 형과 나는 폐업한 비디오 가게에서 아버지가 쓸어 담아온 영화를 보며 자랐었다. 좋아하는 비디오는 몇십 번도 더 보았고 공 테이프에 녹화까지 했다. 수년이 지난 지금도 형과 나는 지겹게도 보았던 그때의 영화들과 장면들을 얘기하며 웃곤 한다. '사랑의 블랙홀', '미세스 다웃파이어', '그린 카드', '홀랜드 오퍼스'는 일찍이 나의 감성과 취향을 결정한 작품들이 되었다.

우리가 이런 영화들에 미쳐하는 걸 아버진 재밌게 생각하면서도 그것들을 진지한 작품들이라고 보지는 않았다. 아버지가 인정하는 영화와 그렇지 않은 영화들은 극명하게 나뉘어 있었다. 코미디가 전자의 대표적 장르였다. 또한 '타이타닉'이라든지 '글래디에이터' 같은 대작 영화들 역시 상업적이고 통속적이라며 깔보곤 했었다. 주류와 유행을 괄시하고 심각하고 무거운 것들을 우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맞다고 하는 건 무조건 받아들이던 성장기라 아버지의 취향을 내 취향이라 착각하고 있었다. 대중적인 것은 일단 얕잡아 보고,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것들을 남다른 안목을 가진 듯 거론할 때 느끼는 우월함을 나는 어려서부터 알았다. 연극영화과에 들어가면서 그 허세는 더 강해졌다. 처음 보는 동기들과 선배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대화는 언제나 좋아하는 영화, 감독을 주제로 돌아갔다. 나는 거스 반 산트, 코엔 형제의 이름을 들먹였다. 그들의 영화는 잘 몰라도 이름을 아는 것만으로도 반은 인정을 받았다. 시나리오 수업에서도 나는 잔잔하고 진지한 이야기들만 썼다. 코미디를 섣불리 언급했다간 망신을 당하기 때문이었다. 웃긴 이야기를 쓰겠다고 하면 주변에선 '영화하겠다는 사람이?'란 반응에서부터 '본인이 웃긴 줄 아나?'라며 기를 죽였다.


취향의 고급과 저급을 가르는 문화는 우리 집에서부터 시작됐다. 부모님에겐 예술적 엘리트주의 같은 것이 있었고 집에선 언제나 고전음악을 틀었다. 새로 이사를 간 집에 동네 사람들이 놀러 오면 어머니는 부랴부랴 바흐니 모차르트의 시디를 플레이어에 넣었다.

"어머, 이런 음악 들으세요?" 집안 가득 울리는 관현악 소리에 이웃들은 말하곤 했다.

"저희는 그냥 이런 게 익숙해요." 어머니는 능청을 떨며 대답했다.

라디오를 틀어도 언제나 고전음악 채널이었다. 조곤조곤한 목소리의 진행자들이 '촤이코프스키'와 '륌스키코르사코프'를 강렬하게 발음하는 프로그램들이었다. 한 진행자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이 곡은 클래식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추천할만합니다. 입문자에게는 다소 어려울 수도 있겠네요.”

이 말이 나에겐 영 껄끄럽게 들렸다. 음악을 즐기기 위해 일정 수준이 돼야 한다는 말인가? 내 생각을 아버지에게 말했을 때 아버지는 내가 클래식을 아직 잘 몰라서 그런다고 했다. 이게 부모님과 나의 차이였다. 나는 음악에 계급이 있다고 생각지 않았다. 마치 먹이 피라미드처럼 음악에도 오페라가 정상을 차지하고 서서 아랫것들을 고전, 재즈, 대중가요, 당근송의 순서대로 깔보고 있다고 보지 않았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오슨 웰스의 영화를 '시스터 액트'보다 수준이 높다고 볼 이유가 없었다. 이는 소수의 엘리트들이 자신들을 대중들로부터 구분 짓기 위해 만들어낸 논리라고 믿었다. 현대미술 전시회에서도 이는 쉽게 보였다. 작품 의도를 난해하기 짝이 없는 말로 포장하는 작가들은 엘리트가 되고자 몸부림을 치는 것이었다. 대중들이 쉽게 알아들으면 열등한 것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카페에 앉아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아버지와 나 사이에서 어머니는 분위기를 바꾸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아버지가 하려는 말씀은 이렇고 내가 하려는 말은 이렇다며 완곡한 말로 바꾸려는 노력은 애틋했지만 급기야는 아예 딴 소리를 하는 수준이 돼버렸다.

"나는 글쓰기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교회에서 하나님 말씀을 듣고 있으면..." 어머니는 중간중간 기독교의 시선을 제공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마음수련도 하나님께서 내게 다른 것들을 더 보라고 명하신 게 아닐까 싶어."

갑자기 맥락이 없는 소리에 아버지와 나는 할 말을 잃고 눈만 껌뻑였다. 그럼 우리는 잠시나마 감정을 추스르고 조용히 할 수 있었으니 어쨌든 중재에는 성공한 셈이었다.

문득 나는 우리의 모습을 의식했다. 종교, 과학, 예술에 대한 거대한 담론을 나누며 열을 내고 있는 꼴이라니. 나는 그저 오랜만에 만난 부모님과 재밌는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부모님과 헤어지고 집에 오자 나는 속이 너무 복잡해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일을 마치고 돌아온 남자 친구는 어둠 속에서 노트북을 켜고 앉아있는 나를 보고 내 기분을 알아차렸다. 우리의 가족들은 비슷한 점이 많았다. 폴도 부모님과의 드라마가 많았다. 집을 방문할 때마다 아버지로부터 이상한 비즈니스 아이디어를 듣는다고 했다. 실행에만 옮기면 성공은 보장인데 폴이 말을 듣지 않는다며 얼토당토않은 화를 낸다고 했다. 아버지는 2차 세계대전에 지극히 관심이 많아서 관련 서적은 밑도 끝도 없이 읽지만 그 외에 세상 물정은 잘 모르는 사람이라고 했다. 나는 폴과 용산 전쟁기념관에 놀러 간 적이 있었다. 폴은 자기 아버지가 좋아할 만한 관광지라며 서울에 아버지를 모시고 와 구경시켜주고 싶다고 했다. 아버지는 다른 문화에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라고 했다. 어렸을 땐 아버지가 데려가 주는 일식집에서 젓가락 쓰는 법과 초밥이라는 음식을 처음 배웠다고 했다. 그래서 서울을 방문하면 같이 먹으러 갈 곳도 많을 것이라 했다. 폴은 한 달에 한번 정도는 가족과 영상통화를 한다. 내가 외국에 살 땐 부모님께 1년에 두어 번 메시지를 보내는 게 다였다.


폴도, 나도 알고 있었다. 우린 부모님의 기대에 못 미치는 사람들이 됐다는 것을. 그럼 어때? 우린 우리끼리 행복한데. 우린 우리 부모님들 나름대로의 최선을 다하여 우릴 길렀다고 믿었다. 부모님이 우리를 낳았을 땐 지금의 우리보다 어린 나이였다. 세상엔 완벽한 부모도, 자식도 없었다. 우리는 어렸을 때 부모들에게서 받은 실망과 상처를 토로하고, 부모들은 우리에게서 느끼는 배신감을 고백한다. 먹이고 입히며 가세가 무너질 정도의 대학 등록금을 바쳐 교육을 시켜놓았어도 돌아오는 것은 여전히 무직장 무주택의 아들이었다. 어머니들은 자식들의 신분상승으로 보상을 받고 싶어 했고, 아들들은 아버지를 미워하면서도 그들의 인정을 받기에 전전긍긍이었다. 유명 가수의 자서전에서, 영화 속 주인공들에서, 팟캐스트 인터뷰에서, 국적이 다른 남자 친구에게서 나는 똑같은 가족들과 갈등들을 본다. 그럼 조금은 초연해진다. 이런 속세의 고통에서 벗어날 길이 있을 거라고 착각하다니. 내가 어리석었지.


남자 친구는 가족 때문에 미치겠다고 불평하면서도 오는 휴가 즈음이면 해외여행이 가능해질 수 있다며 기대에 찼다. 몇 년 만에 가족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폴의 가족은 어떤 사람들인지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재회의 기쁨도 잠시 속 터지는 일은 생각보다 금세 닥칠지도 모른다. 폴 자신도 그걸 점치고 있었다. 오직 가족만이 소환할 수 있는, 자기 깊숙이 숨겨두었던 최악의 면을 목격할 수도 있었다. 그런 폴의 모습을 보면 내가 대답해줄 것이다. "우리 가족도 똑같아"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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