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만에 호주로 돌아갔다. 디지털 노매드가 되어.
'I can't believe you are here!'
소피가 말했다. 단 며칠 만에 이렇게 훌쩍 올 수가 있는 것이냐고. 나는 그렇게 대담할 때가 있었다. 특히 여행이라면 더욱 그랬다. 여행을 한다면 훌쩍. 나는 훌쩍 여행의 정신을 믿고 있었다.
소피와 나는 브런즈윅 Brunswick에서 만났다. 소피가 지난 2년간 살던 동네였다. 힙스터의 도시 멜버른에서도 브런즈윅은 그 정수 같은 곳이었다. 소피가 자주 가는 브런치 카페가 있다고 했다. 일식을 접목한 메뉴를 파는 곳이었는데 일하는 사람들 중 일본 사람은 커녕 동양인으로 보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매장은 만석이었다. 나는 풀드 포크가 들어간 반미를 시켰다. 맛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호주의 브런치가 그랬다. 식당 분위기와 메뉴는 그럴듯하지만 먹고 나면 음식이 어땠는지 모르겠다. 가격과 명성에 헷갈려서 참 좋았더라고 말은 하지만 시간이 지나서 돌아보면 애써 좋았다고 스스로를 확신시켰음을 깨닫는다. 나는 호주 브런치 문화의 허상을 조금씩 벗겨내고 있었다.
3년 만에 다시 만난 소피와 나는 'I can't believe you're here!'와 'I can't believe it either!'를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나도, 걔도 내가 여기와 앉아있다는 게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조금 전만 해도 바다 건너 다른 나라에 있다가 뚝딱 하고 나타나다니. 겨우 이틀 전에 연락해서. 다른 나라로 한 달을 살러 간다는 것은 그렇게 빠르게 행해지는 일이 아니었다.
며칠 전이었던 2023년의 첫날, 나는 엄마와 찜질방에 있었다. 뜨거운 탕에 오래고 앉아있으며 깊은 생각을 했다. 목욕탕이라도 가지 않으면 핸드폰을 놓을 세가 없어서 이렇게 생각이란 걸 찬찬히 할 시간이 없었다. 얼마 전부터 디지털 노매드란 걸 해볼까 조심스레 가능성을 살펴보고 있었다. 내가 지난 반년 간 일해온 회사는 본사가 외국에 있었고 80%가 재택근무였다. 나머지 20%는 일주일에 한 번 한국 사무실에 나가는 일이었다. 한 달 정도는 사무실에 안 가고 100% 원격근무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어느 나라에 있든 내 할 일만 잘하면 문제가 없을 것이다. 시차가 그리 크지 않은 곳으로만 가면 됐다. 어쨌든 이론상으로는 그랬다.
디지털 노매드를 하기에 가장 인기가 많은 곳은 발리라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1월의 발리는 우기라고 했다. 그다음 후보는 치앙마이였다. 거기가 그렇게 여유롭고, 아름답고, 싸고, 디지털 노매드 커뮤니티가 잘 만들어진 곳이라고 했다. 그러나 내륙인 게 문제였다. 나는 바다가 가고 싶었다. 한국의 눈과 추위가 아주 우울했기 때문이었다. 뜨거운 여름의 나라로 가고 싶었다. 그러고 보니 호주가 한여름이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호주가 불쑥 가깝게 느껴졌다. 그래, 호주로 돌아가보자. 바로 그날 멜버른행 비행기표를 샀다. 그 다음날 회사에 소식을 전했다. 사흘 후 멜버른으로 떠나겠다고. 그리고 거기서 일하겠다고. Okay, 상사가 대답했다. 그게 다였다.
Ask for forgiveness, not permission이라는 말이 있었다. 일은 일단 저지른 다음 보는 거라고. 그리고 용서를 구하는 게 낫다고. 허락을 기다리다는 건 너무 오래 걸릴 것 같았다. 비행기 값은 더 오를 것이다. 나는 이것저것 따지고 계산하다가 의욕을 잃고 기회를 놓칠 것이다. 그럼 몇 주고, 몇 달이고 미뤄질 것 같았다. 나는 당장 호주를 만끽하고 싶었다. 거기의 여름이 끝나기 전에.
사흘 뒤, 나는 멜버른에 돌아와 있었다.
밥을 먹고 우리는 브런즈윅의 빈티지 옷가게와 레코드 가게들을 구경했다. 유감없는 힙스터 놀이였다. 금요일 낮이었는데도 거리엔 사람이 많았다. 상점에 들어갈 때마다 나는 기분이 이상했는데 마스크를 쓰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마스크를 쓰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공항에서부터 그랬다. 대략 10%의 사람들만 마스크를 쓰는 것 같았는데 대부분 노인들이나 서비스직에 일하는 사람들이었다. 친구들과 만나면 코로나 얘기가 꼭 나왔다. 멜버른에서는 그동안 락다운이 얼마나 많았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라고 했다. 총 여섯 번의 락다운, 다 합하면 260일이 넘는 기간이었다. 그게 너무 힘겨워서 마지막 락다운이 풀리고 마스크를 쓰지 않아도 되기 시작했을 땐 축제의 분위기였다고 했다. 멜버른은 세상에서 가장 락다운이 많았던 도시가 됐다.
마스크와 백신을 두고 호주에선 말썽이 많았다고 했다. 백신 거부자, 코로나 음모론자들이 의외로 많았던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그런 움직임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지만 아주 적은 숫자라 거의 보이지 않았던 것 같다. 서구의 나라들이 그렇듯 호주도 개인의 자유니 신체의 자유니 하는 그럴듯한 소리로 글로벌 팬데믹이고 뭐고 전면으로 부정하는 사람들로 시끄러웠다. 친구들도 친구의 친구라든지 친척들 중에 그런 사람이 꼭 한 명씩은 있는 것 같았다. 소피는 자기 사촌과 대화를 나누다 무심코 꺼낸 코로나 얘기에 '그런 걸 왜 믿냐'는 식의 태도를 접하고는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라고 했다. 또 다른 친구인 디제이는 자기 엄마와 여동생이 백신 거부자라고 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 그렇다는 건 억장이 무너지는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디제이는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선택을 존중하고 두 번 다시 코로나 얘기는 꺼내지 않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고 했다. 부모자식 사이와 사회를 갈라놓았던 코로나를 모두가 그렇게 그만 잊고 싶은 기색이었다. 마스크를 쓰느니 벗느니 하는 것도 사회분열의 건더기가 됐기 때문에 백신 접종률이 일정 수준을 넘어가자 다들 벗는 것으로 마무리를 짓는 게 가장 속 편한 일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실내 일부를 빼곤 마스크를 쓰지 않아도 되는 단계까지 왔지만 여전히 대부분이 마스크 쓰기를 선택하는 분위기를 보면 마스크 때문에 사회와 정치가 쓸데없이 더 분열되는 일은 면해서 다행인 것 같았다. 내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건 국가도 못 건드린다고 뻐기는 서양인들. 개인주의가 퍼져있어도 어떤 면에서는 나라의 지침에 성실히 따르는 우리나라 사람들.
나는 대학교 친구 사라의 집에서 처음 며칠만 지내기로 했는데 그게 한 달 전체가 돼버리고 말았다. 여기저기로 단기 렌털할 방을 알아봤지만 방세는 3년 전보다 많이 오른 것 같았고 경쟁도 치열해진 것 같았다. 코로나가 사그라들고 국경이 열리자 외국 유학생들과 이민자들이 갑자기 몰려서 그런 것 같았다. 사라의 집은 멜버른에서 꽤 먼 곳에 있었다. 메트로 크레이기번 Craigieburn 노선 마지막 정거장에서 내려 버스로 갈아타야 했다. 대중교통으로는 거의 두 시간이 걸리는 여정이었지만 매일 아침 사라는 자차로 출근을 했기 때문에 거기 따라나섰다가 퇴근하는 시간에 맞춰 다시 돌아오면 됐다. 그렇게 아침에 시내 가까운 동네까지 나와 도서관에서 일을 하다 집에 돌아오는 평일의 루틴이 자리를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