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직", 주무관에겐 사치입니다

현실의 무게 아래 묶인, 가능성이라는 날개

by 유자적제경

안녕하세요. 유자적제경입니다.
한때는 "공무원은 안정적이다"라는 말이 칭찬처럼 들리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그 말이 어쩐지 무겁게만 들립니다.
안정이라는 단어는 때때로 ‘움직이지 못함’을 뜻하기도 하니까요.
그리고 그 움직일 수 없는 가장 대표적인 예 중 하나가 바로 ‘겸직’입니다.


공무원 사회에서 흔히 말하는 '주무관'은 6급 이하의 실무자들을 뜻합니다.
저와 같은 주무관들은 오늘도 행정의 최전선을 지키며 서류를 만들고, 보고를 올리고, 현장을 누빕니다.
그리고 퇴근 후에는, 지친 몸을 겨우 이끌고 집으로 향하죠.

제 주변에도 겸직(유튜브, 공식적 제3수입)을 한다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겸직을 '할 수 있는 시간' 자체가 없는 거죠.
게다가 간신히 허가를 받는다 해도, 겸직으로 얻는 수익은 말 그대로 '콩나듯'입니다.
이런 현실 앞에서 겸직은 ‘부업’이 아니라, ‘사치’처럼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겸직을 금지하는 가장 큰 이유는 ‘도덕적 해이’입니다.

공적인 일을 맡은 사람이 사적인 이익을 챙긴다면, 그 업무의 공정성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원칙.

표면적으로는 타당하게 들리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균열이 보입니다.

예컨대, 고위 공무원들은 법률 자문, 강의, 공기업 사외이사 같은 활동을 통해

일정한 겸직 수익을 얻기도 합니다.

하지만 실무를 맡고 있는 주무관들은 어떨까요?

근무시간 외에도 서류를 정리하고, 보고서를 다듬고,

민원을 대응하느라 퇴근 후에도 ‘출근’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지식으로, 어떤 사람은 권력으로 수익을 만들 수 있는데

어떤 사람은 생계를 걱정해도 ‘공무원이니까 안 된다’는 말로 막힙니다.

공무원의 윤리를 이야기할 때, 왜 우리는 한 단어 아래 너무 다른 현실을 묶어두는 걸까요?

겸직이 공정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겸직의 기회조차 허락되지 않는 이 구조가 불공정한 것은 아닐까요?

이런 제도는 때로는 무능한 시스템보다 더 무서운 침묵을 강요합니다.

'너희는 해선 안 돼. 너희는 욕심을 내선 안 돼.'

그 말들은 결국 사람의 가능성을 제한합니다.


공무원은 한 번 임용되면 평생 같은 일을 반복한다는 인식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시대가 바뀌었습니다.

‘직업’은 하나의 정체성이 아닌, 수많은 역할 중 하나일 뿐이에요.

일본은 이미 2017년부터 중앙부처 공무원의 겸직을 점진적으로 허용했습니다.

교육, 창업, 지역활동, NPO 참여 등 다양한 방식으로 겸직을 확대하면서도,

공직자로서의 윤리와 책임은 여전히 지켜야 한다는 원칙을 병행했죠.

이 제도의 가장 큰 성과는 단순한 수익이 아니라

‘공무원의 자율성 회복’이라는 데에 있습니다.

내가 가진 능력을, 사회의 더 넓은 영역에서 쓰고 싶다는 사람들의 마음.

그 마음을 억누르지 않고, 조율하고 관리하면서도 허용하는 사회.

그게 진짜 선진국 아닐까요?

지금 우리는 점점 더 복잡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사회문제는 더 복잡해지고, 행정이 해야 할 일도 계속 늘어나고 있어요.

이럴 때일수록 다양한 경험과 시야를 가진 공무원이 필요합니다.

단지 매뉴얼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과 접점을 만들 수 있는 공직자.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선, 공무원에게도 가능성과 도전을 허락해야 합니다.

겸직은 그 시작일 수 있어요.

"안정 속의 자유",

그건 어쩌면 새로운 시대의 공무원이 가장 간절히 바라는 말인지도 모릅니다.


공무원이라는 직함은,
결코 욕망을 없애고 삶의 다른 가능성을 포기하라는 명령이 되어선 안 됩니다.

우리는 월급으로만 인생을 설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미래를 준비하고,
아이를 키우고,
노후를 걱정하는 평범한 사람입니다.

겸직이란 단어가 더 이상 ‘도덕적 회색지대’가 아니라,
‘더 나은 삶의 도구’가 되는 날을 기다립니다.
그리고 그 날은,
어쩌면 우리가 조금 더 용기 있게 이야기할 때
조금 더 가까워질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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