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앉던 나를 버티게 한 것들
한국에서는 유급이란 걸 한 번도 경험해본 적 없었다. 더 정확히는, 내가 유급을 할 수도 있다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프랑스 대학교의 시험과 과제는 나에게 큰 도전이었다. 서툰 프랑스어에, 더구나 심리학이라니. 프랑스인들도 어려워하는 과목들을 나는 프랑스어로 공부해야 했다. 내가 선택한 길이지만 쉽지 않은 길이었다.
수업이 끝나면 친구들에게 종종 듣지 못한 단어를 물어보곤 했다. 전공 수업 중 상당수는 교재나 자료 없이 교수님의 설명으로만 진행되었고, 그 자리에서 곧바로 받아 적어야 했다. 어느 날 수업이 끝난 뒤 친구와 남아 공부하고 있는데 교수님이 물으셨다.
“왜 친구들에게 더 설명을 들으려고 하니?”
내가 프랑스인이 아니라 수업 중 몇 단어를 놓쳤다고 하자, 교수님은 놀라며 “나는 네가 프랑스인인 줄 알았다”고 하셨다. 전 학년을 통틀어 심리학과에 동양인은 나 혼자였으니, 교수님은 내가 적어도 프랑스에서 자란 학생일 거라 생각하셨던 것이다.
시험은 또 다른 장벽이었다. 한 학기에 시험은 단 한 번뿐이었고, 그 범위는 한 학기 전체였다. 한 달 반에 걸친 긴 시험 기간 동안, 단 한 번의 점수로 학기 전체가 평가되었다. 과목마다 20점 만점에 10점을 넘어야 했다. 재시험은 학기마다 딱 한번의 기회가 있었는데 재시험을 치르면 이전 점수와 상관없이 재시험 점수로 교체되었다. 학생들은 “높은 점수”보다 “일단 10점 이상”을 목표로 삼았다.
대부분의 시험은 논리적인 글쓰기가 중심이었다. 방대한 범위를 이해하고 A4 두세 장으로 풀어내야 했으니, 언어 장벽까지 겹친 나에게는 쉽지 않았다. 매일 책을 읽고 노트를 정리하며 버텼지만, 오랜만에 공부를 다시 시작한 데다 새로운 언어로 배우는 일은 녹록지 않았다.
그리고 코로나가 닥쳤다. 수업은 중단되었고, 상황은 더 복잡해졌다. 결국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유급’을 경험했다. 그 사실은 너무 충격이었다. 너무 서럽고 한심해서 며칠을 울었다. 그렇게 무너진 건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때 친구들이 말했다.
“나도 프랑스인인데 유급했어.”
“너 잘하고 있어.”
완전히 위로가 된 건 아니었지만, 그 말들이 ‘여기에도 나를 걱정해 주는 사람이 있구나’라는 믿음을 주었다. 그리고 곧 알게 되었다. 프랑스에서는 유급이 드문 일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보다 많은 학생들이 유급을 경험했다.
하지만 이 시기에 나에게는 유급뿐 아니라 코로나 봉쇄, 인종차별, 남자친구와의 이별까지 한꺼번에 몰려왔다. 끝없이 가라앉는 기분이었고, 발버둥칠수록 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하염없이 무기력해지기도 했지만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어느날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한 번도 와보지 않은 나라에서캐리어만 들고 온 나인데, 뭐라도 할 수 있겠지’
그래서 당장 할 수 있는 일부터 시작했다. 뜨개질을 하면서 시작했던 유투브에 일상을 기록했다. 내가 잘 살아내고 있다는걸 기록하고 싶었다. 그리고 온라인에서 뜨개를 하는 사람들을 찾아 교류하기 시작했고, 주기적으로 연락을 주고받았다. 얼굴도 모르는 사이였지만, 그들은 나에게 작은 언덕이 되어주었다.
그 좌절 속에서 나는 많은 걸 깨달았다. 혼자 있는 시간에 익숙해졌고, 내가 왜 이곳에 왔는지, 무엇을 배우고 싶은지 더 명확해졌다. 또한, 실패에도 이유가 있고, 그것이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든다는 걸 알게 되었다.
코로나와 유급이라는 어려움 속에서, 나는 스스로를 지켜내는 법과 작은 일상의 행복을 찾는 법을 배웠다. 뜨개질처럼 사소해 보이는 활동조차 나를 버티게 했고, 누군가의 친절이 얼마나 큰 힘이 될 수 있는지도 경험했다. 결국 유급은 단순한 실패가 아니었다. 그것은 내 삶의 방향을 돌아보고, 혼자서도 성장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준 계기였다. 좌절과 불안 속에서도, 나는 조금씩 나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