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은 결국 비춘다

조금씩 단단해진다는 것

by 라엘

코로나 시기동안 유급과 여러가지 일들이 한꺼번에 몰려오면서 끝없는 추락처럼 느껴졌다.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도 동기도 잃어버렸고 외로움과 불안이 마음을 짓눌렀고,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 스스로를 의심하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주 작고 희미한 빛이 스며든 것 처럼 무너진 줄 알았던 마음 한켠에서 다시 무언가를 시작해보려는 용기가 자라나고 있었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코로나 팬데믹이 잦아들고, 학교가 다시 문을 열었다. 오랜만에 캠퍼스로 향하던 날, 발걸음이 이상하리만큼 무거웠다. 코로나 시기에 인종차별을 겪은 기억 때문인지 ‘다시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머리를 스쳤다.


그런데 막상 학교에 도착하니, 웃으며 인사하는 친구들의 얼굴이 반가웠다. 어쩐지 긴장이 조금씩 풀렸고, 예전의 일상이 천천히 돌아오는 게 느껴졌다. 그렇게 나의 두 번째 대학 생활이 다시 시작되었다.


프랑스 대학교에서 가장 많이 배운 건, 아마 ‘에세이 쓰기’였다.정말 매 학기마다 글을 써야 했다.
처음엔 글의 구조를 어떻게 잡아야 할지조차 막막했다. ‘


논문은 어디서 찾아야 하지? 좋은 자료는 어떻게 고르지? 주제는 어떻게 정해야 하지? 형식은 또 왜 이렇게 복잡하지?’


그 모든 게 어렵게만 느껴졌다. 모든게 어렵게 느껴질 때마다 나는 더 많은 양의 논문을 읽고 감을 찾았던 것 같다. 가끔 친구들과 과제에 대해 이야기하다보면 논문 주제에 대한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기도 했다.


그리고 조금씩 교수님과 면담을 하며 방향을 잡아갔다.하지만 그 시간은 언제나 긴장의 연속이었다.

특히 교수님께서 “Pourquoi? (왜?)”라고 물으실 때면 머릿속이 하얘졌다. 단순히 정보를 나열하는 게 아니라,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를 스스로 증명해야 했다. 그 질문 하나에 답하기 위해 수많은 책을 뒤지고, 자료를 찾아 밤을 새웠다.


vFbIOiAPLpdS0bU-D3IMGkQea4I.JPG 매일 밤 복습의 시간들


나는 항상 내가 프랑스어를 잘하고 있는지 스스로를 의심했다. 모든걸 준비할 때 마다 ‘그래, 너는 프랑스인 학생이 아니였지’라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더 열심히 준비했다. 지금 돌아보면, 그때 나는 글을 쓰는 법보다 먼저 '내 주장을 확실하게 표현하는 방법'을 배웠던 것 같다.


우리 학교 수업은 한 학기에는 2~3과목 정도가 조별 과제로 진행됐다. 첫 수업 시간에 팀을 정하고, 그 팀으로 한 학기를 함께 보내야 했다.


Nb99cXn9DmbLKR79AruFbfez31Y.JPG 조별과제 미팅전 준비


처음엔 낯설었지만, 점점 익숙해졌다.다만 조별 과제는 프랑스에서도 쉽지 않았다. 의견 충돌이 잦았고, 때로는 토론이 싸움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참여하지 않는 친구들 때문에 속상한 일도 많았다.


성실하지 않은 사람에게 화내는 건 결국 의미 없었다. 이러나 저러나 나는 참여하지 않은 사람의 이름을 지울 수는 없었기 때문에 최대한 점수를 잘 받는게 좋았다. 가끔 너무 억울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나는 최선을 다했다는 마음이, 나를 버티게 했다.


코로나가 끝나고 학교로 돌아온 첫 학기에 제일 어려웠던건 그래도 시험이었던 것 같다. 대부분의 시험이 서술형이었고, 그중에서도 ‘정신과적 질환 분석’ 수업은 악명이 높았다.


교수님이 주신 질문 한줄에 대해 내가 알고있는 모든 것을 두시간 안에 적어야 했다. 외국인 학생에게는 사전을 볼 수 있거나 하는 혜택이 있다고 들었지만 나는 그 어떤 것도 바라지 않았다. 정말 프랑스인 학생들과 동등하게 경쟁하고 싶었다.


시험을 볼 때면 단어 하나라도 틀릴까 봐, 문법이 어색할까 봐 늘 불안했다.왜냐하면 이 교수님은 시험지 마지막 줄에 “문법이 완벽하지 않으면 감점”이라는 문구를 명시해두셨다. 그 한 문장이 나를 더욱 긴장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거의 모든 노트를 달달 외웠다. ‘내가 교수라면 어떤 질문을 낼까’ 생각하며 수없이 문제를 만들고 그 문제에 대한 답을 쓰고 지우고 또 썼다.


그리고 드디어 시험이 끝났을 때, 좋은 점수를 받았다.그 순간의 기쁨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마치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다. 단순히 성적 때문이 아니었다.‘아, 나도 이제 프랑스어로 충분히 해낼 수 있구나.’ 처음으로, 스스로를 믿을 수 있었다.


그날 이후 나는 더 이상 ‘유학생’이라는 단어에 갇혀 있지 않았다. 언어의 벽을 넘어선 그 작은 승리가, 내 안의 자신감을 단단히 세워주었다.


이 모든 시간은 결국 ‘적응’의 연속이었다. 적응이란 단순히 환경에 익숙해지는 게 아니라, 두려움 속에서도 자신을 믿고 한 걸음 내딛는 용기라는 걸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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